왜 대한민국인은 조선의 역사를 부정해야만 하는가
역밸에서는 조선의 역사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조선까라고 부릅니다.

또한 조선까는 종종 성토의 대상이 되는데, 조선 500년 역사중 패망의 시기만 보고 조선 500년 역사를 부정한다는 것, 과거를 현재의 잣대로 비난한다는 것이 조선까를 비난하는 사람의 논리입니다.

그러나, 이는 역사를 어떻게 평가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기준의 부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과거를 과거의 기준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일종의 내재적 접근법입니다. 그리고 내재적 접근법의 단점은 존재 그 자체의 합리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경쟁적인 환경에서 생존하고 있는 모든 생물이나 조직은 존재하는 그 자체로 합리적입니다. 그것들은 존재할 만한 이유와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으며 그렇지 않다면 벌써 멸망하거나 다른 생물종에 멸종당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선 역시 마찬가지로, 500년간 존재하였다는 그 자체만으로 그 당시에는 충분히 존재할 이유와 능력이 있었던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이 기준으로 역사를 평가할 경우, 단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긍정평가를 받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느 곳의 듣보잡 왕국이든, 부족공동체든, 군벌이든 간에 역사에 기록되었다면 그 자체만으로 조선과 동등하게 그 당시에 가치가 있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존재할 만했기에 존재하였으며 존재할 만하지 않았으면 역사에 기록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역사가 다 좋고 가치있다는 관점이 과연 온당할까요? 현재를 바라보면 당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북한과 한국은 동시대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두 나라가 과연 동등할까요? 북한도 더 못한 환경과 비교하면 여러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본인의 성향을 아는 사람이라면 본인이 결코 북한을 칭찬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처럼 군벌 도적떼가 난립하여 내전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 핵을 가지고 있다는 것, 외교에서 교묘히 외줄타기를 할 줄 아는 능력이 존재한다는 것 등등 북한이 존재할만한 이유가 있기에 아직까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과 비교한다면 이런 장점의 의미가 퇴색되고 체제의 정당성이나 동원능력, 내부적 안정과 외교적 역량이 뒤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한반도 전체의 영토와 사람에 대한 배타적 영유권을 주장하는 체제경쟁상황에서 어느 국가가 망하고 어느 국가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많은지는 명약관화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저 당시에 존재하였다는 것 뿐만이 아니라,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그 존재를 유지하도록 미래에 대해 대비하였는가에 대하여 추가적인 평가가 필요한 것입니다. 향후 미래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예측하여 판단해야 하는 현재의 평가와 달리, 우리는 과거에 대해 당시에 시대가 어떻게 변해온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 즉 우리의 현재가 당시의 미래인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에 얼마나 적응할 수 있도록 각 국가가 어떻게 당시에 미래를 대비하였는가, 우리의 현재를 만들어 온 국가들 - 당대에 가장 앞섰던 나라들에 비해 얼마나 현재와 근접한 미래를 대비하고 있었는가를 평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관점에서 본다면 조선의 저력을 인정할 수도 없으며 조선의 역사를 긍정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간혹 고려나 신라를 언급하는 사람도 있지만, 고려나 신라시대와 비교하여 조선시대는 특별한 시대입니다. 고려와 신라시대와 타 국가와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조선시대에 영국과 프랑스 독일 미국 등 현재를 이룩한 서구열강이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민주혁명등 현재를 구성하는 주요한 발전을 이루는 동안 조선은 정체하였기 때문입니다.

조선이 당시에 상상할 수도 없었던 우리의 현재를 갑작스럽게 맞이하였다고 변명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러한 변명만으로 조선이 책임져야 했던 한민족의 복리와 권리를 내팽개쳐버린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분명 미래는 쉽게 예측가능하지 않으나,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살펴본다면 과거에서 현재로의 변화가 완전히 불규칙한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현재가 과거를 살아간 사람의 의지와 관계없이 던져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현재로의 변화를 선도하는 과거의 앞선 국가의 의도적 활동이 현재를 만들고 주도하였으며, 조선과 같이 뒤쳐지고 정체된 국가에게만 현재가 던져진 것일 뿐입니다.

과거에 현재로 변화를 선도한 국가라 할지라도 그 방향으로의 변화가 항상 필요불가결한 것은 아니었으며, 현재와 거리가 먼 선택을 할 수 있었고, 오히려 그 편이 더 당대에 가능성이 있었던 길일 수도 있었습니다. 이슬람제국처럼 어떤 시기에는 현재와 가까웠으나 다시 멀어진 국가도 있으며, 고대 그리스나 로마처럼 민주주의와 법치라는 선도적 개념을 도입하고서도 다시 그 개념과 멀어졌으나 이후 후계국에게 기초를 제공한 나라도 있습니다. 과거의 영국이나 미국도 항상 지금처럼 번영과 선도의 길로 향하지 않고 언제든지 후퇴할 수 있었으며, 그들의 후퇴가 얼마든지 인류 전체적인 제 2의 제 3의 암흑시대로 역사에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볼 때 어느 시기 어느 장소라고 하여 반드시 특정한 경로를 걸어야 한다든지 특정한 관념의 포로가 되어야 한다는 결정론적 시각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는 주변 환경이 전부 독재 왕정이었으나 왜 민주주의제도를 도입하였으며, 고대 로마는 고대 그리스나 고대 왕국의 길을 가지 않고 법치를 도입하였는가 질문을 해야만 하며, 어째서 서양인들이 과학적 사고와 천부인권 민주주의를 생각할 동안 조선인은 음양오행설과 군신유의 장유유서라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느냐는 질문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조선이 혁신적 관념을 도입하여 앞서나갈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또한 당대의 관념, 당대의 기준으로 성공한 국가가 계속 버텨서 성공적으로 변화를 따라잡은 경우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영토와 인구, 군사력은 언제 어느때이건 타국의 침략에 맞서 버틸 수 있는 힘이었으며 넓은 영토와 인구를 보유하였지만 철학, 제도, 기술등이 뒤떨어진 국가가 영토와 인구를 소모하면서 버티고 이후 따라잡는 형태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뒤떨어진 철학, 제도, 기술에도 불구하고 독일에 맞서 버텨내고 2차 세계대전에서 결국 어느정도 따라잡아 영토와 인구의 힘으로 이긴 러시아나 전국이 식민지가 되는 것을 피하고 일본의 침략에 맞서 버티고 최근에 변화를 따라잡고 있는 중국, 역시 너무 커서 한 국가로 다 넘어가지 않고 버텨내고 비록 일부의 영토이지만 주된 민족의 영토를 지켜내고 변화를 따라잡은 오스만 투르크-터키를 보면 조선 역시 과거에 영토의 확장이 일정 수준 이상이었다면 일본이 단번에 식민지로 삼는 일을 할 수 없었으며, 변화를 따라잡을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일본과 같이 서양의 침략을 받고서야 대응하였으나 내부개혁을 한 이후 변화를 따라잡는 것입니다.

이 3가지 가능성이 있었지만 조선은 그 중 어느 하나도 만족시키지 않았기에 시대가 변하자 그대로 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냥 망한 것도 아니고 일본에 식민지로 먹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조선인과 그 후예는 나라없는 백성이 되었으며, 조선총독부가 토지조사사업 등에서 일본인 편향적인 결정을 내릴 때 옛조선인과 그 후예는 어디에 항의할 수도 없었으며 일본군 시위진압부대에 의해 학살과 방화가 일어나도 명예회복과 보상을 받을 길이 없었으며 유언비어로 살해당할 때 살해용의자에 대해 응분의 사법처리를 요구할 수도 없었고 원하지도 동의하지도 않았고 의사를 표시할 기회도 없었던 전쟁에 동원되어 물자를 빼앗기고 전장에 나가서 목숨을 잃었으며 노무자로 끌려가 고통을 받고 정신대라는 명목으로 성학대를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학대와 모욕과 억울함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무슨 죄를 지었기에 조선인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것만으로 이런 억울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당시 제국주의일본을 이끄는 일본인에게 제대로 사람대접하라고 항의해도 별무소용일 것입니다. 일본인에게 조선인의 후예는 그들의 일부가 아니며, 조선인의 후예가 받는 고통을 그들의 고통으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문화적, 감정적, 혈연적으로 일체감을 느끼며 한 공동체를 이루어 서로의 고통을 공감하고 서로를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일군의 사람들이 한 정치적 단위를 이루도록 독립하여 각자가 각자에게 사람대접을 하도록 하는 것이 고통을 피하기 위한 최선의 수단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정치적 단위는 조선이 망하지 않았더라면, 망하더라도 외세의 간섭을 억제하고 조선인 내부의 힘으로 조선인과 한반도를 영위하는 다른 정치적 단위를 배출해 내었다면 유지되었을 것입니다. 조선의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의 조상은 고통받았고 억울함을 겪었고 상처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근현대의 역사를 배울 때마다 조상의 고통에 공감하며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왕조가 하나 생기고 하나 망하는 그런 개념으로 조선을 받아들일 수 없고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왕조가 망할 때가 되었는데 하필이면 그때가 서세동점기였고 하필이면 그때에 서양을 따라잡고 있는 일본이 곁에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했다는 식의 역사관이 수동적이고 당하기만 하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아는 대한민국인을 양성할까 보아 두렵기까지 합니다. 조선이 미리 서양으로 먼저 갔으면 발전하는 서양을 미리 보았을 것이며 주변 국가에 대한 정보수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면 영국의 무기가 매우 강하다는 것 일본이 힘을 기르고 한국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며 역대 왕조가 망한 원인을 파악하여 미리 대비하였으면 세도정치를 겪지 않고 내부개혁을 할 수 있는 내부역량을 마련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적극적인 정복활동을 노렸다면 처음 시작했을 때 조선의 힘의 1/10도 못했을 누루하치가 명의 방해를 물리치고 여진족을 통일한 역사가 조선의 여진족 흡수라는 다른 역사로 나타날 수도 있었습니다. 비겁한 변명은 이제 집어치워야 합니다.

작금의 정세도 그리 대한민국에 이롭지 않은데, 조선 옹호자들은 그럼 이제 대한민국도 망할 때가 되었다고 할 것입니까? 하필이면 미국이 망하고 중국이 흥하게 되었고 하필이면 민족이 통일되지 못했고 하필이면 강대해진 중국이 한반도에 대해 역사재해석을 시도하며 형성된 영토야욕이 가시화되어 이후 망하게 되었다고 할 겁니까? 하필이면 그런 미래가 올 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정말 괜찮은 나라였지만 망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할 겁니까?

지금부터 그런 평가를 하게 되는 것은 누구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 옹호자들의 사고방식은 이런 평가와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분명히 여러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가 외부환경을 탓하고 우리에게 열린 기회의 문을 보지 않을 때 그 문은 닫히게 될 것입니다. 조선에게 열려있었던 가능성과 그 가능성이 현실화 하지 않았던 역사를 교훈삼아 대한민국은 일차적으로 대한민국인과 그 후손을 위하여 바람직한 미래를 대비하고 또 선도하여야 하며 더 나아가서는 대한민국이 전인류의 복리를 증진시키는 역할을 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by teferi | 2010/08/31 18:16 | 잡생각 | 트랙백 | 덧글(11)
동성애라는 정체성은 무조건 인정받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홍세화가 프랑스의 똘레랑스 사상을 소개한 이후로 똘레랑스는 그야말로 절대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성과 합리주의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 포스트모더니즘 사조에도 부합하고, 대중의 도덕적 직관에도 부합하고, 자신은 다른 의견에 대해 자유로이 받아들이는 똘레랑스를 가지고 있지만 자신을 반대하는 남은 그렇지 않은 앵똘레랑스이니 때려잡아야 한다는 식으로 다른 사람을 공격하기도 좋지요.

그러나 주류심리학-라캉논쟁이나 진화론-창조과학논쟁, 의학-한의학 논쟁과 같이 필연적으로 공존할 수 없는 이론체계가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창조과학자가 자신은 진화론을 인정하니까 진화론자도 창조과학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더라도 진화론과 창조과학 한쪽은 완전히 죽어서 사라져야 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진화론자가 창조과학을 공격하는 것이 앵똘레랑스라고 하더라도 이는 합리적이며 정의에 부합하는 것이고 창조과학이 똘레랑스를 내세우며 공존하려고 해도 이를 타파해야 하는 것입니다.

동성애에 대한 논쟁도 이러한 점을 살펴야 합니다. 과연 동성애라는 정체성이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법과 도덕과 같이 공존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먼저 증명되어야 하며 그 다음에 동성애도 사회의 다양성 유지 차원에서 허용되어야 하고 차별받지 말아야 한다는 도덕적 주장이 증명되는 것이지 동성애라는 정체성을 누군가가 주장한다고 해서 그건 정체성이니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by teferi | 2010/01/05 10:35 | 잡생각 | 트랙백 | 덧글(2)
맑스의 노동가치론은 왜 잘못되었는가
맑스는 추상화된 노동의 사회적 평균투입량이 가치를 결정한다고 주장하지만, 시장이 없으면 그 가치는 결정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장이 존재할 때 노동투입량으로 가치를 측정할 수는 있으나 가치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노동을 투입한다 할지라도 가치가 없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단순히 땅을 파헤친다든지, 대약진운동에서처럼 철제 기구를 원시적인 방법으로 녹여서 다른 철을 만들어보려고 한다든지 하는 일 등 가치없는 노동투입은 아주 많습니다.

맑스는 이런 비판을 각 개인의 노동이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평균적으로 투입되는 노동에 의해 가치가 결정된다고 비켜가려고 했으나, 그가 건설하고자 했던 사회주의국가에서는 애초에 그 명제가 성립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사회주의국가에서는 대약진운동, 스타하노프운동처럼 노동동원의 시도가 있었고 전 사회적으로 노동이 투입되었지만 가치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적으로 평균적으로 투입되는 노동을 결정하는 것은 시장이기 때문입니다. 어디에 얼마나 노동을 투입할 것인가 하는 결정은 시장의 반대편에 있는 수요자의 지불용의에 의해 결정됩니다. 자유경쟁시장을 가정한다면 지불용의가 많으면 노동을 많이 투입할 것이요 적으며 노동을 적게 투입하는 방법을 찾거나 거래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 평균적으로 투입되는 노동에 의해 가치를 측정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혁명을 일으켜 시장을 없애버린다면 무엇에 노동을 많이 투입해도 되는지, 무엇에 노동을 적게 투입해야 하는지를 결정할 수 없으며 노동을 적게 투입할 동기도 없습니다. 따라서 사회주의국가에서는 노동동원을 선호하게 되고 사람의 수요와 관계없이 사회주의정권의 입맛에 따라 노동을 투입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회주의국가의 경제는 파탄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by teferi | 2009/11/30 13:20 | 경제 | 트랙백 | 덧글(9)
공리주의는 틀렸으며, 국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리주의를 상징하는 말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함은 존재하지 않는 허상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행복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데에 이미 주관적인 편의성(bias)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윤리의 원리로 삼고 행동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그는 자신의 행복뿐만이 아닌 타인의 행복을 주는 행동을 , 나아가서는 자신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그 희생이 최대 다수에게 행복을 준다면 그러한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이 의도한 행동이 타인에게 행복을 주는지 아닌지를 누가 측정할까요? 그런 측정은 결국 행동의 대상이 되는 사람 본인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공리주의에 따라서 행동한다면 그런 측정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될 것이며, 공허한 최대 다수의 행복만이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믿고 행동했지만 그 누구에게도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것 말입니다.

사회주의 혁명이 바로 공리주의의 오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사회주의혁명가는 자신의 몸은 고달프지만 자신이 이룬 혁명이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일부의 사람이 희생되더라도 절대 다수는 행복하리라 믿어서 각종 숙청작업에 참여했지만 결국 행복해진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즉,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람이 타인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것은 거대한 오류일 뿐입니다.

즉 행복을 정의하는데 제 3자의 위치에 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행복은 자기 자신의 행복을 정의할 수 있을 뿐입니다. 타인의 행복을 내가 정의했을 때, 타인이 그러한 행복을 인정했을 때에만 의미를 갖는 것이며, 그 행복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의도한 타인의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로 공리주의는 윤리의 원칙으로 부적절합니다. 오로지 자기 행복의 원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 즉 자신이 무엇을 해야 행복을 얻을 수 있는지를 잘 이해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타인의 행복을 침해하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행복은 타인의 도움에 의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므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 타인의 행복을 이루어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개개인이 인정한 개인의 행복이 모두 모인 것이 공익이며 다수의 행복이 되는 것이지 어떤 이가 최대 다수의 행복을 강변하더라도 그것이 최대 다수의 행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어떤 이가 공익을 위한다 하면 타인이 자신의 행복을 찾는 과정에 대한 도움을 줄 수는 있어도, 타인의 행복을 정의해서 제공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최대 다수의 행복 개념은 국익일 것입니다. 국가라는 실체가 존재하고, 국가의 이익과 손해가 개별 국민의 이익과 손해와 별개로 존재한다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거짓에 불과합니다. 개별적인 국민에게 이익과 손해가 돌아가서 이익을 보는 국민이 손해를 보는 국민에게 이익을 이전하고도 이익이 남는 사람이 있을 때 대한민국 국민에게 이익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나는, 혹은 다른 사람은 국가의 이익 때문에 손해를 볼 지 모르지만 국가적 관점에서 이익이 손해를 초과하기 때문에 국익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by teferi | 2009/11/16 17:09 | 잡생각 | 트랙백 | 덧글(2)
주류경제학의 이론적 한계, 베이비시터 조합 관련된 사고실험
유명한 경제학 주제로 베이비시터 조합이 있습니다. 변호사 부부로 이루어진 이 조합은 아기를 한번 맡을 때 쿠폰을 지급받고, 나중에 쿠폰을 주고 아기를 맡길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 조합은 처음에는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모두가 언제 할 지 모르는 외출을 대비해서 여유 쿠폰을 가지고 있으려고만 하고 아기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외출을 할 수 없었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주에 두번씩 아기를 맡기는 것을 의무화하자 아기를 맡는 일도 많아지고 아기를 맡기고 외출하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나중에는 인플레이션의 조짐까지 보였다고 하죠.

이 일화는 화폐와 거래간의 지나치기 쉽지만 지나칠 수 없는 관계를 보여줍니다. 화폐가 없으면, 거래도 없다는 거죠. 아무리 재화가 있더라도 화폐 보유자에게 화폐를 주고 매각하지 않으면 다른 재화를 구매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주류경제학은 항상 무한한 수요/공급능력을 가정합니다. 그렇지만 어느 것도 실제로 무한하지는 않습니다. 전체 경제규모에 비해 너무나 작아 무시할 수 있는 개인을 가정한 이론이기 때문에 그렇게 가정한 것이지, 실제로는 공급도 유한하고 수요도 유한하죠. 화폐 공급량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주류경제학은 항상 개인이 화폐를 충분히 보유하고 있다고 가정합니다. 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현실과 먼 가정이죠.

만일 베이비시터 조합의 쿠폰양이 제한되어 있으며, 쿠폰의 절반 이상을 특정한 개인이 보유하고 있고, 각 개인이 보유하고 있는 쿠폰양은 개인이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적립해 놓고자 하는 양보다 작다면 어찌 될까요? 개인은 쿠폰을 보유하려고만 하고 아이를 맡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거래는 위축되고 고통스럽습니다. 이 때 절반 이상을 보유한 특정한 개인은 쿠폰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을 수 있겠죠. 개인이 보유한 쿠폰이 필요양에 미치지 못할수록, 신규 쿠폰이 발행되지 않을수록 이자는 올라갈 수 있습니다. 대부가 없을 때보다는 거래가 활성화될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쿠폰을 빨아들여서 거래가 더욱 위축되고 쿠폰대부에 의존하게 되는 부작용이 발생하게 되죠. 따라서 화폐 발행이 제한된다면 화폐 소유자의 횡포가 기승을 부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한된 재화에 따른 이익이라고 하여 화폐지대로 이름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20세기 이전은 금본위제의 시기였으며 중상주의와 맑스주의가 등장했지요. 중상주의는 중금주의라고 하는데 수출을 많이 하고 금을 비축하려는 정책을 말합니다. 아담 스미스는 금은 국부가 아니라고 비판하고 생산물이 국부라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금이 부족하면 화폐도 부족하고 거래가 일어나지 않아 국부가 증진되지 않습니다. 또한 금이 부족한 나라에 금을 빌려주고 이자도 받을 수 있죠. 금은 채굴할 수는 있으나 원하는 대로 채굴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20세기 이후 케인즈의 등장으로 금본위제가 폐기되어 인류는 디플레이션과 인플레이션, 고리대금의 굴레에서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또한 수출/수입 분쟁에도 금본위제보다 효과적이었죠. 누군가 화폐를 축적하려는 시도를 한다면 화폐가 시장에서 사라지기에 인플레 걱정 없이 화폐를 발행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적자가 누적되면 문제가 발생하지만 바로 화폐가 시장에서 사라져서 거래를 위축시키는 금 유출보다는 나은 것이죠.
by teferi | 2009/10/29 02:00 | 경제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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