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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정치경제이론이라 함은 일반적으로 맑스의 이론에 기반하고 노동과 노동자를 중시하고 자본주의에 반대하며 기성 체제에 저항하는 것 등을 포괄하고 있는 이론을 말합니다. 좌파와 우파이론이 동등한 가치가 있고 동등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으며, 좌우의 날개로 비유하며 한쪽이 없어져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목 : 이글루스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반영하는 글 제목 : 좌파 정치경제이론을 죄악이라 부르는 것은 무지입니다. 제목 : 너는 악이다. 제목 : 東海 [生ダコ, 韓国刺身専門店] 제목 : 수꼴보수 정치경제이론을 지지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 본문은 읽을 필요 없다. 주목하는 부분은 세계 상황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상이한가 하는 지점이다. 위의 상황에서는 '사람들을 많 ... more ... 고 좌빨과 좌파는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럼 그 차이점에 대해 한번 말해보라는 말에는 묵묵부답이었다. 얼마전에는 좌파 경제이론을 두고 어처구니 없게도 좌파 정치경제이론을 지지하는 것은 죄악입니다.라는 포스팅이 이오공감에 올라오기도 했다. 얼마안있어 이를 바로 잡는 포스팅인 좌파경제이론을 죄악이라고 부르는 건 무지입니다. 라는 포스팅이 ... more 예전 공산당 얘기를 꺼내며 현재의 부조리를 덮으려는 우파 역시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현실의 정치경제이론 역시 많은 한계가 있습니다. 현실이 최선이며 개입은 악이라는 생각도 잘못입니다. 그러나 자본의 권력과 독재를 교묘한 말로 가린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은 선의를 가지고 있으며, 설령 악의를 가지고 주장한다 하더라도 주장할 때 내세운 선의에 의해 제약을 받습니다. 즉 현실이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효과적으로 증명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현실 제도 하에서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주장하는 대안은 다음 포스팅에 있습니다. 지금 원인이 무엇 때문에 이렇다고 주장할 수는 없으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그건 조그만 단계에서 실험해서 지식을 축적하고 점진적으로 확대한다는 겁니다. 설령 사회주의를 한다고 해도 일단 조그만 사회주의 공동체부터 성공적으로 만들어놓고 더 큰 공동체를 만들 생각을 하라는 겁니다. 조그만 공동체도 만들다 보면 자신의 생각과 안맞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게 되면 더 큰 공동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해답도 알게 되는 겁니다. 문제를 정녕 못 해결하겠다면 사회주의는 잘못된 것이니 다른 방법을 시도하면 됩니다. 실패해도 조그만 규모에 한정되니 크게 손실이 되지 않습니다. 빈곤을 해결하는 것도, 여러가지 방법론, 많이 버는 사람이 도와주면 된다, 가난한 사람이 더 많이 벌게 하면 된다 등등을 한 사람의 인생을 지속적으로 개선하는 작은 단위에서부터 열명 백명 천명 만명 확대해가며 빈곤을 개선하는 겁니다. 당장 국가재정 얼마를 뻥하고 투여해서 빈곤을 한방에 잡는다는 생각을 버리고 한사람을 도와주더라도 그 사람이 장기적으로 개선된 인생을 살게 하게끔 도와주고 그 지식으로 다른 사람도 돕는거죠. "현실의 정치경제이론"은 인류 최고의 사상가들의 관찰, 사유, 설명, 계산(공식)이 만들어낸 지적 산물입니다. 경제학을 공부하는 저나 글쓴분 teferi님이 한두개 포스팅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특히나 이런 좌글루스에서는요.)
저는 teferi님의 글을 오늘 처음 봤지만 "과학적 사고방식, 현실 관찰(설명), 비판적 사고"라는 세 단어를 보며 이분이 경제학을 공부하신 분이란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즉, "현실의 정치경제이론"을 우습게 보지 말아달라는 결론만 얘기하겠습니다. "이들"의 오류나 잘못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진짜 딱 하나요.(제가 보기엔.) "부유층이나 기업측에 대한 감세가 전체 경제의 성장을 이끈다"는 이론이 가장 많은 비판과 눈초리를 받고 있죠? 기업들에서 후원한 몇개 연구에서 이를 증명하려고 했는데 미국의 크루그먼 교수(세계적인 경제학자이자 2008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즉, 현실 경제이론의 권위자)도 이는 잘못된 것이라 했지요. (후련하십니까?) 그외에 뭐가 오류고 잘못입니까? 정부에 있는 사람들 바보 아닙니다. 자기 땅값 올리려고 말도 안 되는 음모 세우는 사람들 아닙니다. 더이상 제 손가락이 아깝군요. 좋은 밤 되십시오. 저는 (학교과정에서) 맑시즘도 배웠으며, 좌파경제이론도 (이건 좌파모임에서) 배웠습니다. 하지만 경제학도로서 주로 "주류 경제학"을 배웠습니다.
많은 분들의 리플을 보고 한숨만 나올 뿐입니다. 정말 경제학을 아십니까? 공부하신 적은 있으세요? 배우신 적은요? 공부한 사람들이 괜히 "주류 경제학"을 하는게 아닙니다. 과학적 사고방식, 현실 관찰(설명), 비판적 사고라는 면에서 좌파경제이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블로그를 만들어 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식의 비생산적이고 맹신적인 리플과 의견이 판치는 곳에서 수백번 포스팅해도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블로그 만들 생각이 싹 가시는군요. -_-;; 그래서 주류경제학이 최선이고 지금 우리가 가진 현실이 한계라는 결론
입니까? 아니면 그래서 주류경제학 안에서 뭐 개선책이 나올 거라는 말입니까? 좌파경제이론이 뭘 할 수 있지 않냐고 물을려는게 아니라요. 괜히 주류경제학을 하는 게 아니면, 그게 최선이라는 건데, 이런 작금의 상황을 연구하고 공부하면서 뭘 하시는 건가요? 아니 무슨 생각을 하면서 무엇을 염두하면서 연구하는 거에요. 그 많은 학도들은. 상대를 까지만 말고 자기들 얘기를 해야죠 그럼. 자기들 얘기는 쏙 빼고 남의 단점만 깍아내리는 거에 열올리는 게 주류 경제학이 하는 짓이죠 보통~ 어디가서 생산적인고 합리적인 리플과 의견이 판치는 곳에 블로그와 포스팅을 한다해서 와~하고 대단하게 달라질 게 있나요. 이건 뭐 결국 자기 잘났다는 거 아니에요. 달리 좌글루스겠습니까
저도 처음에는 아니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나? 하고 당황했었는데 찬찬히 보니까 뻘소리하는 애들은 정해져있어요 다만 얘들이 맨날 여기서 죽치고 있으니까 숫자가 많아보이는거죠 거기다 얘들이 뭐하는 애들인지 알고 나니까 의문이 풀리더군요 여기서 개소리하는 애들 뭐하는지 한번 파악해보세요 당원이 절반입니다 절반 님이 위에 단 덧글 보았습니다.
저는 정부에 있는 사람들 바보가 아니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걸 물어볼려는 게 아니고 그게 궁금한 것도 아니였습니다. 님이 말하신 것 하나 그것 외에 오류이거나 잘못인 것 없는 것도 알겠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 하나의 오류나 잘못이 아니라 무수히 수많은 오류나 잘못으로 비춰질 세계적 편차를 가진 빈곤과 고통, 부의 편중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도들께서는 하나의 오류나 잘못 밖에 없는 그 주류경제학으로 저런 것들을 어떻게 다루고 계시는 지를 물어보는 겁니다. 00// 바로 그런 주장을 음모론이라고 하지요.
제 무덤 파시기 보다는 올바른 주장으로 상대를 공략하시길. 피켓라인이 저번 민중의례사건때
이게 선전선동의 좋은 기회라고 대놓고 리플에 쓴거 보면 너도 음모론이니 뭐니 이런말 안할거다 ㅋㅋ 궁금하면 니가 직접 당원이 몇명인지 세어봐 재밌을거야 여긴 좌글루스임. 여기에 지금 뻘글올리는 사람 중에 경제학사상사 한권도 읽지 않은 사람이 50% 이상임.
적어도 이 정도 포스트를 올릴 정도면 맞고 틀리고 간에 상당한 공부를 한걸로 보이죠. 여기 리플올린 사람들 토론 뜨면 전부 떡실신임.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계획경제와 공산주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놈이 태반임. 언제나 자기네들만이 정의이고
언제나 자기들만이 주류라고 생각하는 정신. 설령 반대의견이 자기네들보다 더 많을지라도.... 오히려 반대의견이 많은 이글루스가 더 이상한것이며 좌빨인것.... 정확하지도 않은 증거를 갖고 머리속에서 시나리오 굴려서는 멋대로 멀쩡한 사람들 다 당원으로 만들지 않나 경제학도 모르는 놈이 50%라고 자기머릿속에서 만든 통계결과를 내지 않나. 이쯤되면 독선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니미럴
도대체 니미 궁긍한 걸 물어봤는데 그래서 도대체 질문에 대한 답이 뭐냐고 물어봤는데 좌빨글루스니, 50%는 병신이네 어쩌네 감정적이고 비논리적인 답글은 지들이 다 달고 있으면서 같은 편이라고 똑똑한 척하던 놈들은 속으로 키득대며 양아치처럼 모른척이나 가장하고 있고. 치사해 죽겠다 진짜. 그러면 여긴 무슨 경제학도들만 와서 말 할 수 있는 공간이냐? 그럼 아예 경제학을 최소한 4년이상 공부한 사람만 와서 놀으라고 규칙을 정해놓던지. 뭐하는 인간들이냐. 맹신의 답글을 다는 인간들은. 이글루스에 민노당원이랑 진보신당원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 사람도 있나? 허허// 똑같은 논리로 주장한다면....
"이글루스에 한나라당 당원, 뉴라이트 회원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 사람도 있나?" 이렇게 비슷한 류의 반박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명확한 근거없이 음모론식 비난을 한다면 말이죠. 주인장도 음모론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거늘.... 어째 댓글 다시는 분들은 음모론에 입각해서 상대방을 까대는건지. 정확한 근거도 아닌걸로 이리저리 시나리오 굴려 음모론 짜서 비난하는 사람을 곧 '사회 분열을 조장하는 자'라고 많이 부르곤 하죠? 애석하게도 당신들은 이미 그 덫에 걸렸습니다. 여기 반대의견들을 비난하고 싶으시면 그렇게 분열조장을 하지 마시고, baltak님이 말씀하신것처럼 감정적,비논리적 글로 승부하기 보단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근거와 팩트를 들어 상대방의 의견이 어디가 틀린것인지 공략하시길 바랍니다. 단순한 원색적비난이라면 시정잡배도 다 합니다. 정독하니 이 양반의 논지는 이해가 간다.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로 1. 실천 집단에 대한 비판이라면, 특정 집단을 적확히 구체화하고 비판하셨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2. 이론에 대한 비판이라면, 이미 마르크스주의 학자임을 자처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소위 말하는 '속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많은 비판이 있어 왔습니다. 실제로 '속류 마르크스주의'는 현재 마르크스주의 학자들 사이에서 실질적으로 기각 혹은 표현하신대로 "퇴출"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마르크스 이론 자체는 기각되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사회(과)학계에서 그렇습니다. (물론 분과학문으로서의 경제학에서는 거의 "퇴출"당했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내부적으로 비판을 받은 '속류 마르크스주의'를 기각한다고 하여 마르크스주의 이론 자체를 기각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 자체를 기각하기 위해선 더 복잡한 결들에 대한 비판이 필요합니다. 3-1. “현실을 관찰하여 이론을 검증하는 과학적 사고방식”이라는 관점에 대해 “관찰의 이론 의존성(theory-laden observation)” 테제로 그 기저 자체를 비판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즉, 경험적 실증주의와 귀납추리에 의거한 과학관을 비판하는 방식인데, 가장 근본적으론 객관적 과학 활동의 근저라 상정되는 관찰 행위가 객관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관찰“이라는 인지 행위는 외부세계에 대한 감각자극을 통해 얻어진 raw data와 더불어 인지대상의 선택과 인지방식 등에 대한 관찰자 개인에 내제한 사전적인 ‘이론’에 의존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 의존 정도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겠지만, 최소한 ”관찰“의 순수성을 비판하는 지점에 대하여 유효한 반박을 하지 못한 채 특정한 이론이 ”과학적“이지 않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고 단언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관찰의 이론 의존성“ 테제에 따르면, 과학 활동의 근저인 ”관찰“ 역시 관찰 이전의 ‘이론’에 의존합니다. (과학 활동의 기본인) 관찰 이전의 '이론'이기 때문에 결국 (논리적으로) ”과학적“일 수 없으며, 오히려 ”권위적“이라 보아야 할 실천에 토대를 두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3-2. “이론은 현실의 관찰로 검증”하는 것이 우월하며, 나아가 그렇지 못하면 그 이론은 폐기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지니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전제는 “현실의 관찰로 검증” 가능할까요? 아니면 소위 “과학적”인 것이 곧 우월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는 근대의 주류적인 믿음과 그 믿음이 이미 확보한 권위에 따른 것일까요. 1. 지적을 수용하고, 다음부터는 정확한 정의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지요.
2. 적어도 한국에서는 맹위를 떨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정확하게 비판대상을 정의하지 않아서 반박을 받는 것은 저의 책임입니다. 3-1. 과학이 인정받는 것은 어떤 사람이 관측하더라도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각 개인은 편향성을 가지고 있지만 여러 개인이 관측한 결과가 동일하다면 이 편향성이 제거되었다고 볼 수 있고 진리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죠. 3-2. 현대 과학의 승리를 관찰함으로서 검증할 수 있습니다. 이론이 예측한 대로 정확한 실험값이 나오는 것을 검증했기에 생산 현장에서 이론이 예측한 값을 대입하여 생산에 활용하고 그 결과는 성공적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찾는 방법은 과학적 방법론이 유일한 것입니다. 과거 자연에 대한 여러가지 사고가 있었지만 과학적 방법론에 의거한 사고만이 참되고 이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4원소설을 이용한 연금술과 원자론과 양자역학을 이용한 원자의 충돌로 다른 원소를 만드는 것의 차이입니다. 사회과학은 사회의 특성때문에 통제된 실험환경을 갖출 수 없으나, 현실에 적용된 이론을 관찰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과 그렇지 않고 그저 머리로만 사고하여 이론을 채택하거나 반박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한계는 있으나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못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좌파 경제학이 현재 대한민국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는 건 좀;;
그건 아무래도 납득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만. 그걸 먼저 증명해 보이셔야 님의 이 본문 글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1.은 소모적인 논쟁이 많이 줄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에서고, 2.는 '이론'과 '특정 이론을 유용하는 이들의 현실 정치적 실천'이 같지 않다는 점을 명확히 구분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 경우 이론 자체를 완전히 기각함으로써 실천집단을 비판하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이론은 이론 자체로 내적체계화와 복잡화를 이루는 학자 공동체 속에서 (실천집단의 방향과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방향으로) 계속 논의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실천집단을 정확히 지적하며 그들의 실천 자체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3-1. 안타깝게도 "어떤 사람이 관측하더라도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사례들이 자연과학의 역사 속에서만 해도 여럿 발견되고 있습니다. 파스퇴르와 푸쉐의 대를 이은 논쟁은 유명한 일례입니다. 동일한 실험 결과를 두고 다른 “관찰”을 하게 되는 것은 무엇을 “다른”것으로 보고 무엇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실천적인 측면에서도 “동일한 것”에 대한 공동체적 합의가 이루어지는 과정이 매우 권위적입니다.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면 비트겐슈타인이 가족유사성(family resemblance)이라고 표현한 지점과 맞닿아 있습니다. 즉, 동일성에 대한 관찰이 “이론 의존적”이라는 점은 의존하는 집단적 “이론”에 입각하여 “동일한” 결과라는 가족유사성이 규정된 결과임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가족유사성을 공유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관측에 대해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것입니다. 과학 활동에서 “관찰”의 결과가 동일한 것은,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동일한 가족유사성을 공유하지 못한 “관찰”들을 ‘틀린 것’으로 배제하는 권위적인 활동이 매우 체계적으로 일어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과학 활동에서 “관찰” 결과를 발표하는 논문이 지니는 형식, 형식 및 결과에 대한 peer-review가 해당 논문의 validity를 규정한다는 점 등에서 이러한 권위적인 활동의 작동을 추측 가능하고, 과학사 속의 사례들이 이러한 추측을 검증합니다. 제가 말하는 사례/예시들을 여기서 다 쓸 수는 없으나 관련한 내용은 A. F. Chalmers의 『What Is This Thing Called Science?』에는 구체적으로, 윌리엄 브로드/니콜라스 웨이드의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은 더 간단하지만 읽기 쉽게 적혀 있습니다. 그 외에도 과학사회학 관련 논문들에서도 다수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일이 적어 드리지 못하고 대충 reference만 드리는 점은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3-2. 과학적인 방법론에 입각한 모델이 입력과 출력에 따른 예측된 결과를 도출하는 것은 맞습니다. 실제로 현대 자연과학 체계는 매우 정교하고 체계적인 설명/예측 모델임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유용하고 예측 가능한 것은 그것이 실천적 차원에서 유효한 정교한 모델이라는 점 이상을 우리에게 알려 주지 않습니다. 이용가능성은 긍정하지만, 그것이 “참되다”―사전적 정의대로 “진실하고 올바르다”는 뜻이라면―는 것은 화자의 가치판단이 짙게 들어간 주장입니다. 만약 이용가능하기 때문에 ‘진실하고 올바른’ 것이라는 뜻이라면, 이 역시 ‘이용’에 가치의 방점을 찍는 하나의 믿음의 발현입니다. 이용할 수 있는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전제에 따른 하나의 관점이니까요. 사회과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회‘과학’이라고 한 점에서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모방함으로써 자연과학적 방법론이 획득한 객관적 우월성의 지위를 지향하는 부분이 있는 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실제로 이런 관점에서 경제학은 가장 “과학적”이라고 일컬어지며, 반대로 사회학 등은 상대적으로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분과학문으로서의 경제학에서 퇴출되다시피 하는데도 사회학에서는 여전히 주요한 하나의 축으로 남을 수 있는 것도 이러한 분과학문별 성향 차이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현실에 적용된 이론을 관찰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 즉 가설을 관찰 사실들을 통해 연역적으로 검증하는 것은 사회과학에서도 중요시하는 방법이며, 실제로도 질적/양적 방법론을 개발하여 나름의 연역적 검증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부정하지 않고, 부정한 적도 없습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위에서 언급한대로, 소위 “과학적 방법론” 역시 특정한 전제와 가치체계에 기반한 방식이며, 그 기저는 “과학적”이기보다는 오히려 “권위적”인 지점이 포착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는 우선 “권위”자체가 ‘악’ 혹은 ‘틀린 것’이며 반대로 “과학”이 ‘선’ 혹은 ‘옳은 것’이라 말하는 이분법에 틈이 있음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나아가, “과학적 방법론”이 절대선이자 유일한 진리의 담지 방법이라는 주장이 나름이 전제와 가치지평에 입각하는 만큼, 다른 이론이나 방법론들, 가령 마르크스주의 이론 역시 그 기저에 놓인 전제와 가치지평에 따라 내적 체계화된 방식에 따르면 나름의 가치를 지닐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해주신 바대로 “과학적 방법론”이 한계가 있는 만큼, 다른 이론 및 방법론, 가령 마르크스주의 이론 역시 나름이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할 수 있는 것처럼, 다른 이론 및 방법론, 가령 마르크스주의 이론 역시 나름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식으로 마르크스주의와 과학적방법론을 은근슬쩍 같은 반열에 올려놓는 일을 뭐라고 하죠? 네, 맞아요, 물타기라고 합니다 ㅎㅎ 아르/과학적 방법론이 완전한 과학적 방법론이 아니라고 해서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권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오류의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훈련을 받으며 다양한 요인을 통제하고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또한 권위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방법론을 거쳐 검증된 이론은 현실을 훌륭하게 설명하고 예측치와 동일하거나 비슷한 결과를 내는 이용할 수 있는 이론이 되었습니다. 이용할 수 없는 이론은 쓸모없다는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예측치와 다른 결과를 내는 이론이 퇴출되지 않는다면 현실을 호도하여 의도와 다른 결과를 내게 하기 때문입니다. 현 과학적 방법론에 오류가 있다고 과학적 방법론이 다른 방법론과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정확히 구분하지 않아 위위의 덧글과 같은 혼선이 생겼는데, 일단 이 점은 사과드립니다.
“과학적 방법론”은 [관찰 - 경험의 일반화 - 법칙추출 - 가설설정(설명/예측) - 관찰]의 순환 과정 속에서 귀납적인 법칙 추출과 연역적인 법칙 검증을 행하는 방법론입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하나의 이론 체계로, 방법론은 아니며, 때문에 “과학적 방법론”과 대등한 비교 대상은 아닙니다. 다만, 두 가지가 대등한 지점이 있다면 근본적으로 어느 하나가 절대적인 “참”이라고 할 만한 ‘객관적’인 근거는 없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과학적 방법론”은 나름의 전제들을 지니고 있으며, 이에 대한 비판 지점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마르크스주의 또한 나름의 전제들 위에 구축된 체계이며, 이에 대한 비판 지점들 또한 분명히 존재합니다. 저는 이 글이 비판하고 있는 방식, 즉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과학적”이지 않다는 (그리고 나아가 “권위적”이라는) 이유로 “틀렸다”라고 하는 방식에 대해, 그러한 비판 방식의 근거 역시 동일하게 비판받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과학적 방법론”으로 논점이 옮겨 간 것입니다. “과학적 방법론”은 위에서 두 개의 긴 덧글로 적어 놓았듯 “관찰의 이론 의존성” 테제에 의해 그 순수성과 객관성을 비판받고 있으며, 이러한 ‘이론’의 개입 부분은 여러 층위에서 해당 관찰자가 속한 공동체의 “권위적”인 실천에 의해 구축되고 있다는 과학/지식사회학자들의 주장을 더한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위의 글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틀렸다”고 비판한 방식과 동일하게,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한 비판의 근거인 “과학적 방법론” 역시 “틀렸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 지점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방법론”은 자연과학 및 사회과학의 주류 방법론으로 여전히 그 유효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저 또한 “과학적 방법론”을 무용한 것으로 취급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동일한 방식으로 비판을 받은 마르크스주의 이론 역시 마찬가지로 비록 그러한 비판 지점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유효성을 인정받을 부분이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가치지평이 개입합니다. 이론의 유효성, 혹은 그 가치를 무엇을 기준으로 규정할 것인가 하는 부분입니다. teferi 님이 “이용할 수 없는 이론은 쓸모없다는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예측치와 다른 결과를 내는 이론이 퇴출되지 않는다면 현실을 호도하여 의도와 다른 결과를 내게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하시는 데는 이론의 주 목적이 현실을 설명하고 ‘예측’ 하는 것이라는 자연과학적 관점에 인간의 삶에 변화를 야기하는 방식에서 도구적으로 유용하게 쓰여야 한다는 공학적 관점이 전제되어 있다고 봅니다. 반면, 이론이나 학문/과학의 목적이 인과적 설명과 ‘이해’라고 보는 막스 베버의 관점은 사회학적 견지에서 이론의 가치를 판단하는 주요한 준거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차이를 고려하고서도 위와 같은 방식의 글쓰기를 하고 계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관찰의 이론 의존성”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시는 것 같으니 “과학적 방법론”이 “진리”를 발견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은 이제 포기하신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다만, ‘이용’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이시는 것을 반복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의 이론의 ‘이용’을 위에서 언급한 자연과학-공학적 관점에서 ‘예측’에 방점을 두고 파악하시고 계신데, ‘이용’은 그것만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금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론은 현상을 ‘이해’하는 데도 이용할 수 있고, 누구들처럼 자기가 필요한 방식으로 부분 발췌하여 사람들을 선동하고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방식으로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teferi 님이 생각하시는 “참된” 이론은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하여 “예측”을 통한 설명을 가능케 하는 이론 이라는 것을 정리해 낼 수 있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생각에 동의할 것입니다. 실제로 자연과학 이론과 방법론이 지금과 같은 절대적인 위상을 차지하게 된 것도 그러한 관점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teferi 님은 스스로 생각하시는 “참된” 이론이란 이런 것인데,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이런 기준에서 벗어나므로 “틀린” 이론이다, 라는 식으로 깔끔하게 주장을 하셨으면 됐을 일입니다. 실제로 칼 포퍼의 경우 자신의 ‘반증가능성’을 준거로 무엇이 ‘과학’인가―사실은, 무엇이 과학‘이어야’하는가 하는 규범적인 주장이었지만―를 제시하고, 이 기준에 따라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과학이 아니다’라며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위의 본문이 비판을 가하는 방식은 이와는 사뭇 다릅니다. 일단 비판하는 집단에 대한 규명도 정확하지 않으며, 이론에 대한 비판도 그 비판의 근거 또한 제가 바로 위에서 제시한 것처럼 명시적으로 제시되고 있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 두 가지가 애매모호한 방식으로 어느새 연결되어 함께 비판의 대상으로 묶여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관심 가진 부분은 이 글이 비판을 위해 전제하고 있는 관점이나 준거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비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채 비판을, 그것도 (마치 종교적 신념에 따라 단칼에 선악을 재단하는 것처럼) 매우 극단적인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글이 지닌 가장 큰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전제들에 입각해 의견을 체계적으로 개진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가치와 전제들이 근본적으로 우월하거나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이라는 식의 발언은 종교적인 신념과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사실, 저는 인간은 누구나 종교적이라고 생각하기에 종교적인 신념이 나쁘다고 보지 않습니다. 다만, 스스로 그러한 “종교적” 방식에서 벗어나 “과학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지닌 “과학”에 대한 종교적 신념을 볼 때마다, 그 모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긴 합니다. 꽤 기다렸는데 답이 없군요. 현실의 과학적 방법론이 권위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이 과학적 방법론이 틀렸다는 것과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관찰이 이론에 의존하는 측면이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틀린 이론이 언제까지나 지지를 얻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과학사에서 증명되고 있습니다. 이론이 현실을 곡해하는 것도 한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견했으나 양자역학은 완강히 반대했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권위가 효과를 발휘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예전에 권위를 갖던 이론이 계속적인 설명력을 갖지 못해서 쓰러진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과학은 그 이론이 어디까지 맞는것이라는 것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관찰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맞는것이라는 겁니다. 상대성 이론이 옳다고 하여 뉴튼 역학이 완전히 부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뉴튼 역학 역시 관찰에 의해 성립하였고 그 관찰의 한계를 넘어서는 지점에서 상대성 이론이 성립하였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뉴튼 역학은 일상적인 상황에서 훌륭한 근사값 계산을 해낼 수 있습니다. 관찰로 인해 성립한 이론은 결코 뿌리채 뽑히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맑시즘의 경우 어디부터 어디까지는 맞고 어디는 그르다고 할 수 있습니까? 노동자는 자본가 계급을 타도해야 한다는 공산당 선언이 잘못일까요, 아니면 노동의 가치가 상품으로 평가받을 때는 노동의 생산비에 불과하게 된다는 노동가치설이 잘못일까요? 아니면 전부 옳고 공산주의의 비극과 멸망은 후대의 책임에 불과한 것일까요? 과학적 방법론에 의거하지 않으면 이런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과학적 방법론의 한계는 현 인류의 한계에 불과한 것이지 결코 다른 연구방법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이 사전적 의미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과학은 인류가 찾은 최선의 진리이기에 진리로 취급해야 하는 것이며, 과학적 방법론에 의거하지 않은 다른 연구는 그르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과학적 방법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본문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틀렸다”고 말한 근거는 그대로 과학적 방법론에도 적용된다는 뜻입니다. 자연과학 활동 역시 근저로 파고들면 “권위적”인 실천입니다. 이는 마르크스이론이 “권위적”이기 때문에 “틀렸다”고 지적하는 부분에 대한 우회적 반박입니다. “현실의 과학적 방법론이 권위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이 과학적 방법론이 틀렸다는 것과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하신 부분 역시 그대로 돌려드리겠습니다. 현실의 마르크스주의 이론 연구방식에 권위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틀렸다는 것과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 연구가 그 근저에 마르크스주의 이론이라는 권위적인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 이론 역시 현상과 불일치하는 지점들에 대해 모두 지지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속류 마르크스주의'는 이미 학계에서 지지 기반을 잃었으며,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전통을 잇는 이론가들도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모든 것을 긍정하지 않습니다. 많은 부분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이론을 전개합니다. 가령,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이론의 계보 하에 있다고 평가되는 피에르 부르디외는 결코 공산주의 혁명을 외치지 않았습니다. 마치 과학사가 엄격하고 객관적인 반증의 역사인 것처럼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큰 착각입니다. 실제로 과학사는 도리어 반증보다는 관찰 결과 발견된 anomaly를 기존의 이론 체계로 포섭하는 추가 설명의 구축에 헌신하는 역사에 가깝습니다. (reference가 필요하시다면 토마스 쿤의 논문이나 그 이후의 과학사가, 과학사회학자들의 논문에서 사례들을 발견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당시 자본주의가 가장 심화되었다 평가되던 영국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대신 소련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 관찰 결과(anomaly)에 의해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기각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일었을 때, 레닌이 제국주의론을 통해 이러한 anomaly를 마르크스주의 이론 안에 체계적으로 위치시켰습니다. 포퍼는 이러한 방식을 결코 과학으로 인정하려하지 않았지만, 자연과학자들의 실천 역시 많은 부분 이와 흡사합니다. 가령, 입자물리학에서 특정한 문제가 발생하면 새로운 입자를 상정하고, 이를 소위 “실험적으로 검증”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입자를 구성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적 체계화를 더욱 공고히 해온 과정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이는 과도한 일반화입니다. 다만, 자연과학 영역 내에서 일어나는 실천과 사회과학 영역에서 일어나는 실천의 거시적인 유사점을 보이기 위한 일례 정도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한 가지 자연과학 영역과 사회과학 영역의 차이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과학 장 내에서 특정한 이론이 설명력이 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기각되는 일은 분명 일어납니다. 특정한 패러다임 내에서라면, 해당 패러다임에 어긋나는 가설은 “틀린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자연과학 장의 경우 여타의 장보다 단일한 패러다임을 공고히 지니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패러다임이 소위 말하는 “과학적”인 성향의 기준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회과학 장의 경우, 자연과학 장에 비해 단일하고 공고한 패러다임을 지니고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는 연구 대상의 차이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자연과학의 경우 연구자 집단과 대상 간의 상호 영향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객관적인 통제와 이에 따른 실험 및 검증이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사회과학의 경우 연구 대상은 연구자 집단과 마찬가지로 나름의 가치 준거와 규범 체계를 지니고 의사를 표출하는 인간 집단입니다. 때문에 연구자 집단과 대상 집단 간의 상호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사회과학 영역에서는 자연과학 영역이 숭상하는 통제 및 실험 검증의 과정이 상대적으로 어렵습니다. 즉, 특정한 “관찰”에 대해 그것이 “관찰”된 조건 및 환경을 똑같이 조성하고 다양한 요소들을 통제한 상황을 재현하여 상호 검증하는 일이 더욱 어려우며, 이 때문에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관찰”했는지를 동등하게 공유하는 과정 또한 자연과학에 비해 단일한 기준으로 귀결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자연과학 역시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관찰”했는지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견의 여지가 좁혀지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다만, 이런 경우 기존의 패러다임에 더 부합하는 이론적 배경을 지닌 집단이 “권위”를 얻어 정설로 수용되고, 반대 측면의 주장은 “틀린” 것으로 치부되는 상황이 사회과학보다 자연과학 영역에서 훨씬 많이 발생합니다.) 이와 같은 연구 대상(혹은, 연구 대상을 규정하는 방식)의 차이는 연구 방법론의 차이를 낳습니다. 이는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여 다른 방법론들을 무조건 “틀린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른 것’은 무조건 ‘틀린 것’이라는 편협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닌 한 말이지요. 과학이 한정된 영역에서 자신의 설명력을 주장한다면, 마르크스주의 이론 역시 관찰이 허락하는 한정된 영역에서 자신의 설명력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사회를 서로 갈등하는 투쟁의 공간으로 규정하며 하나의 강력한 이론 틀을 제공합니다. 이는 사회를 유기적으로 기능하는 통합체로서 바라보는 완전히 상반된 이론 틀과 대등한 하나의 이론으로서 여전히 충분한 설명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현상은 갈등론으로 설명되며, 어떤 현상은 기능주의로 설명됩니다. 반대로, 갈등론은 특정 현상을 배제하고, 기능주의 역시 특정 현상을 배제합니다. 뉴튼 역학이 미시적 현상을, 양자역학이 거시적 현상을 배제하는 것과 흡사한 부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관찰로 인해 성립한 이론은 결코 뿌리채 뽑히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체계 또한 나름의 “관찰” 결과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행성의 역행과 순행을 “관찰”한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를 토대로 deferent를 따라 도는 epicycle의 존재를 구축하였습니다. (아시다시피, 행성의 역행과 순행은 차후 코페르니쿠스 패러다임 하에서 천동설을 부정하는 “관찰”로서도 사용됩니다.) 물론 프톨레마이오스 패러다임은 관측 기술의 발달과, 결정적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도입으로 인해 뿌리째 뽑혀 사라졌습니다. 현재의 과학 체계 역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체계와 다른 입장이라고 보장할 만한 하등의 근거를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패러다임 하에서는 특정한 이론이 “어디까지 맞는것이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을지언정, 여전히 그것이 “진리”라고 보장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날 마르크스주의 이론이라는 패러다임이 전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축적된 anomaly들을 더 이상 이론의 내적 체계화를 통해 포섭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시점이 올 수 도 있겠지요. 하지만 현재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내부적으로 일정부분 비판은 있을지언정 전체를 모두 기각하기에는 내적 체계화 과정이 여전히 진행 중인 하나의 패러다임입니다. (노파심에 첨언하지만, 위에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차이에서 설명했듯, 자연과학의 단일하고 강력한 패러다임과는 위상의 차이가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옳고 그름은 단일한 준거를 공유할 때 확정적으로 규정됩니다. 자연과학 영역은 특정한 패러다임이 지니는 권위가 매우 강하며, 이는 강력하고 단일한 준거를 제공함으로서 과학자 집단이 나름의 옳고 그름을 재단할 준거를 공유할 수 있도록 작용합니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분명 “관찰” 사실에 의거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단일한 준거를 완전히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개념은 완전히 닫혀 있을 수 없으며, 이 때문에 관찰된 사례들은 특정한 개념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집단의 negotiation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로 자연과학 영역이 잠정적으로 공유하는 기준 역시 인위적이며, 권위의 작용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관찰”의 대상/자연이 스스로 “진리”에 대해 말하지 않는 한, 관찰이 이론을 규정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자연은 스스로 말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자연과학이 지니는 단일한 기준 역시 절대적이고 확고부동한 “진리”에 근접하고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회과학 영역은 단일한 준거를 공유할 수 있는 기반이 더욱 부족합니다. 사회과학 연구의 대상은 스스로 말을 할 수 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단일한 준거를 지니는 데 더욱 어려움을 줄 뿐입니다. 동일한 분류 체계를 제시함으로써 단일한 준거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어디부터 어디까지는 맞고 어디는 그르다고“ 말하는 것이 자연과학과는 다른 수준으로 일어나며, 해석의 여지도 더욱 분분합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 역시 이러한 지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렇듯 대상의 차이에 기인하는 ‘다름’이 있습니다. ‘틀림’이 아닙니다. 차이를 무시한 채 어쨌든 내 기준에 맞는 것만이 선하고 참되다는 종교적인 신념을 준거로 삼지 않는 한 말입니다. (물론, 과학주의가 중세 유럽의 기독교를 대체하는 근대의 믿음 체계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과학에 대한 ‘종교적’인 믿음을 지닌 이들이 많은 시대이긴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과학적 방법론이 “틀렸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같은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 이론 또한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연과학이 인간 실천의 영역에서 완전히 분리된 “진리”라는 보장이 없는 한, 그것이 유일한 준거로서 다른 영역의 옳고 그름을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과학 지식과 과학 활동의 방법론은 (그 개념상 절대적이고 근본적이며 무오류를 담보하는) 신의 목소리와 신의 방법론이 아닙니다. 그 역시 인간의 실천일 뿐입니다. “과학은 인류가 찾은 최선의 진리이기에” 같은 명제 역시 결코 자명하지 않습니다. 과학적인 방법론에 입각한 모델이 입력과 출력에 따른 예측된 결과를 도출하는 것은 물론 인정합니다. 애초에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입출력 결과가 모델 수립의 기준이니, 당연하지요. 다만 그렇기에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연과학이 매우 정교한 모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뿐입니다. 저는 teferi 님의 글과 덧글에서 (자연)과학이 "진리"─만약 존재한다면─라고, 아니면 최소한 "최선"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찾기 어렵습니다. 다만, 도구적 유용성을 선(善)으로 생각하는 분이라는 점을 추측할 뿐입니다. (자연과학의 유용성은 저도 인정합니다. 정교한 입출력 모델로서 자연과학 지식 체계는 다양한 영역에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적 유용성을 제공합니다. 아마, 중세의 종교가 지녔던 절대적인 신념 체계가 사라진 근대 이후 자연과학 영역이 여타의 영역에 비해 높은 위상을 지니게 된 것은 이러한 도구적 유용성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으로 작용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게다가, 명제의 자명성 이전에 개념 사용의 문제도 있습니다. 현재적 의미에서 ‘최선’과 본질과 절대를 상정하는 ‘진리’는 엄밀히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리는 인간이 멋대로 취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그 개념상) 본질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믿음을 정당화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전략적으로 이 둘을 혼용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진리가 아니라고 말했다면, 진리가 아닌 것으로 취급하십시오. + 사실, 이 포스트의 경우 특정 집단의 행태를 구체적으로 집어 비판했다면 상당히 유효하고 공감을 받을만한 비판 글이 되었을 것입니다. 나름의 논리력이 있는 분이기에 더욱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특정 집단을 넘어 ‘마르크스주의 이론’ 자체를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이 글은 근거의 빈약함과 과도한 논리적 비약 등에 대한 대응 비판에 대해 매우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글에 달린 덧글들이 모두 유효한 비판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비판의 대상이 구체적이지 못한 것을 넘어, 폭력적인 실천을 자행한 특정 집단들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 자체까지 전방위로 넘나들며 분별력을 잃어버린 점에 대해선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이를 연구하는 집단에 한정한 저의 논의를 읽어 오셨으니, 이런 지적은 굳이 하지 않아도 이미 인식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그르다’, ‘악하다’ 등이 아니라 ‘도구적 유용성이 떨어진다’ 는 식의 비판이었다면 이 역시 많은 부분 공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도구적 유용성의 측면에서라면 근대 자연과학이 지닌 위상은 독보적인 수준이니까요. 과학적 방법론에 권위주의적 요소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고 하여 맑스주의와 직접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과학적 방법론에 의하면 잘못된 이론으로 인한 오류는 결국 수정됩니다. 즉 체계적 오류가 0에 가까워진다는 것입니다. 단지 인간의 한계로 인해 비체계적 오류가 잠시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나 맑스주의는 맑스 개인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론의 전개를 맑스가 말한 것이 옳다는 전제하에서 진행합니다. 그렇기에 맑스의 이론이 잘못이라면 이를 근거로 한 모든 이론이 잘못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체계적 오류가 존재합니다. 어떤 맑스주의자는 그렇지 않다고 할지 모르지만, 과학자는 어떤 과학자는 그렇지 않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모든 과학자가 과학적 방법론을 따르고 이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과학자가 아닌 겁니다. 일부의 맑스주의는 변명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유사 맑스주의"에 대해 "올바른 맑스주의자"가 걸러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맑스주의는 언제 맞고 언제 틀리는지를 잡아내지 못한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입니다.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다는 말은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은 관찰의 한계 내에서 최선의 이론을 도출하기 때문에 그 한계 내에서 맞는 것입니다. 심지어 완전히 그르다고 하는 천동설도 항성의 이동의 근사값을 도출해 낼 수 있습니다. 다만 지동설에 비해 지나치게 복잡하기 때문에 이제 아무도 그 이론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맑스주의는 현상의 관찰이라기보다 개인의 신념의 표명이며 세계관에 가까운 것입니다. 맑스주의자중에 현상의 관찰에 근거한 논리를 펴는 사람을 본 일이 거의 없습니다. 맑스가 이야기했기 때문에 ~다 가 아닌, 지속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 ~이기 때문에 ~가 옳다는 식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 사례는 제가 댓글에 단 것에도 많은데,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가 된 http://sumbolon.egloos.com/4253957 의 포스팅과 댓글에서도 드러납니다. 문화가 중요하냐 정치가 중요하냐는 문제는 과학적 방법론에서는 그저 사실판단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즉 문화를 개선했는데 대중의 삶이 더 나아졌다든지, 아니면 자신은 정치는 별로 소질이 없고 문화를 중요시해서 대중에 더 기여할 수 있다든지 하는 식의 논리가 가능합니다. 굳이 문화를 중요시하는게 눈꼴사납다면 정치가 이렇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문화는 작은 부분을 차지할 뿐이라고 증명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맑스주의의 세계에서는 단지 사회정치적 이슈를 다루지 않았다는 것, 개량주의라는 것 만으로도 비판을 받습니다. 개량주의든 혁명주의든 그 결과로 승부하면 되는데 개량주의자는 결국 과격파가 아니기에 자본주의사회에 충실히 복무하며 자신의 욕망을 충족할 뿐이고, 현실의 부조리에 대해 눈을 감아버린다는 식의 논지가 전개됩니다. 누가 사회가 부조리로 가득찼다는 것을 인정했으며 사회정치적 해법이 최선임을 인정했습니까? 선결과제가 남아있는데도 이를 그냥 지나칩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현실의 관찰에 의거하지 않은, 맑스의 권위에 의거한 논리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어떤 과학자가 이런 이유로 비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아무리 학계의 권위가 있다고 해도 과학자는 그 이론이 현상의 관찰을 설명하지 못할 때 비판을 받지, 기존의 이론이 옳기에 그 이론을 부정했다고 하여 비판을 받지는 않습니다. 사실 과학자는 기존의 이론이 옳다고 배우기 전에 자신이 그 실험을 똑같이 따라해서 진짜 이론에 따른 결과가 나오는지 보라고 교육을 받습니다. 그래서 과학자의 논의는 생산적인 결과가 나오지만 맑스주의자의 논의는 아무런 결과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동어반복이나 다시 말하겠습니다. “과학적 방법론에 의하면 잘못된 이론으로 인한 오류는 결국 수정됩니다. 즉 체계적 오류가 0에 가까워진다는 것입니다. 단지 인간의 한계로 인해 비체계적 오류가 잠시 존재할 뿐입니다.”라는 식으로 “진리”(오류가 0인 상태)를 상정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를 길게 해 두었는데, 여전히 딱히 근거 없이 “진리”의 존재를 장담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패러다임 전환을 기술한 쿤의 연구를 보면 과학자들이 “진리”라고 여겼던 것이 사실은 진리가 아니었으며, 차후 다른 “진리”가 과학자 집단 전체를 지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것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단절적 전환가능성을 내포한 ‘패러다임’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패러다임 내에서는 오류를 줄여 나가는 과정이 존재하지만, 패러다임이 전환된 후에는 그 과정 자체가 뿌리째 오류가 되어 버립니다. 고로 현재 과학자공동체가 공유하는 토대로서의 과학적 방법론 또한 오류가 0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anomaly들을 체계 내로 더더욱 정교하게 편입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는, 인간이 논증할 수 있는 영역 밖입니다. 이 체계를 이루는 토대―패러다임―이 전환되는 경우 틀 자체가 전복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오류가 0에 가까워진다”는 식으로 장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자연과학 지식체계도 마르크스주의 이론체계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특정 토대가 옳다고 상정한 채 anomaly들을 체계 내로 편입시키기 위한 이론 세련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은 매우 흡사합니다. (물론 동일할 수 없음 또한 위에서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차이에 대해 이미 장황하게 늘어놓았습니다.) 특정한 연구자의 방식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 평가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는 동료 연구자들이 상호 규정합니다. 과학자 공동체가 특정 연구자의 방식을 과학이 아닌 것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렇듯 과학의 경계 짓기는 집단적 실천을 통한 규정이지, 본질적으로 무엇이 “올바른” 과학이고 무엇이 과학이 아닌지 “미리” 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적 방법론이라 규정된 방식 역시 이러한 과학자 집단의 실천 속에서 권위를 획득한 강력한 틀인 셈입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 뿐 아니라 사회과학 영역 전반에 걸쳐 이러한 단일한 틀은 존재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 점이 자연과학과 ‘다른’ 점이라는 것도 위에서 장황하게 기술했습니다. 자연과학이 단일한 준거를 제시할 수 있기에, 이에 따라 맞고 틀림을 재단하는 데 훨씬 효과적이라는 점은 십분 인정합니다. 반면, 사회과학 영역은 상대적으로 그러하지 못하다는 점 또한 윗글에서 이미 말했습니다. “과학은 관찰의 한계 내에서 최선의 이론을 도출하기 때문에 그 한계 내에서 맞는 것”이라는 점은 과학자 공동체 내에서는 성립하는 명제입니다. 동일한 준거에 의해 무엇이 최선인가에 대한 합의를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일한 준거를 공유하지 않는 다른 집단에 대해서까지 특정 집단의 준거를 무조건 숭상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폭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다름'과 '틀림'을 구별하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자연과학 분야 역시 신념과 가치관, 세계관에 기반을 두어 출발합니다. 입자단위의 세계관은 근대 물리학의 기반입니다. 근래는 이러한 세계관을 전복시키는 초끈이론에 대한 연구도 따로 진행 중입니다. 물론 초끈이론은 현재로선 관찰/실험/검증이 불가능한 영역이므로 기존의 패러다임을 전환시키고 있지는 못합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 또한 연구 영역 내에서 현상(관찰사실)과의 일치를 근거로 내세우는 점은 동일합니다. 과학 활동 역시 그러합니다. 다만, 그 '일치'의 기준에 대한 해석의 여지는 사회과학 영역이 자연과학 영역에 비해 더 큰 것은 사실입니다. 들어주신 예시 부분인 “문화가 중요하냐 정치가 중요하냐”가 어떻게 사실판단이 될 수 있겠습니까. '중요'를 따지는 기준에 따라 달라질 문제입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그 '기준'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자연과학적 접근방식을 하나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분은 그것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될 일이고요. 기준이 단일하다면 옳고 그름에 대한 규정도 가능합니다. 중세 서구 사회에서는 종교가 그 잣대로서 강력한 권위를 발휘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당시에는 “진리”였던 분류체계가 지금은 아닌 것이지요. 과학이라는 현재의 분류체계 또한 그렇지 않다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맑스주의의 세계에서는 단지 사회정치적 이슈를 다루지 않았다는 것, 개량주의라는 것 만으로도 비판을 받”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저는 마르크스주의 세계에 들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만약 그러하다고 전제하더라도, 저는 반대로 자연과학의 세계에서는 과학적 방법론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비판을 받는다고 말하겠습니다. 이는 근대 이후 자연과학의 권위에 의거한 과학자 공동체 내 단일한 준거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과학자 공동체를 넘어 계몽주의 이후 근대 사회 대부분에 암암리에 퍼져 있습니다. 실례로 과학자가 아닌 teferi 님 또한 이를 암암리에 숭상하며 옳고 그름의 준거로 당당히 사용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마르스크주의 이론 체계 또한 나름의 준거를 가지고 있다고 (저는 추측해―마르크스주의 이론 연구자 집단의 일원이 아니기에―)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역시 반복적으로 말하지만, 자연과학 영역과는 달리 사회과학영역에서 볼 때 마르스크이론은 단일한 준거가 결코 아니며, 마르크스주의 이론 내에서도 자연과학 영역처럼 강력하고 권위적인 단일한 패러다임이 체계화되어 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정도와 방식의 차이는 엄존합니다. 자연과학 영역 내에도 논리적 선결과제? 라고 할 만한 것이라면 세상의 근본 구성단위에 대한 부분은 남아 있습니다. 입자론적 세계관을 정설로 받아들이는 물리학계라지만, 이를 부정하고 더 근본적으로 진동-공명하는 에너지의 고리가 세계의 기본 단위라는 초끈이론이 아직 증명되지는 않은 채, 하지만 분명한 논란의 대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자연과학 역시 이 부분은 덮고 지나간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이러한 방식은 사실 자연스러운데, 토대 자체는 임의적이나마 어딘가에서 미답상태로 '당연시'되며 지나가야 하며, 그렇게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주의도 (자연과학 체계보다는 훨씬 덜 복잡하고 덜 세련화되어있지만) 나름의 당연시하는 토대가 있는 것입니다. 관찰에 의존한 방식 또한 관찰 이전의 이론에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또다시 말씀드리며,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지니는 권위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0과 1이라는 본질적인 선긋기는 되기 어렵다는 점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과학자 공동체 속에서 가장 강력한 권위를 행사하는 것은 학계가 아니라 패러다임 자체입니다. 기존의 이론을 부정했다고 비판을 받는다는 말을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에 어긋날 때 비판을 넘어 아예 “틀린 것”으로 낙인찍히는, 더 나아가 애초에 그것을 어긋나는 방식의 문제 설정 및 연구 방법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권위의 작동을 말합니다. 이런 지점에서 비교를 한다면 마르크스주의 이론 연구 과정에서 드러나는 '비합리성'은 자연과학 역시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자연과학이 물리현상에 대한 강한 설명력을 제공하는 것처럼, 마르크스주의 이론도 사회현상에 대한 강한 설명력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양자 모두 나름의 생산적인 결과를 도출해 내고 있습니다. 물론 그 설명 범위에는 공백이 있고, anomaly들도 관찰됩니다. 때문에 이론 세련화가 일어나는 것이며, 이것이 곧 연구 과정입니다. + 특정한 준거를 (그것도 자연과학자라는 특정 집단에서 특히 강화-재생산되) 마치 절대선인 것처럼 포장하여 다른 집단의 준거를 애초에 틀린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 자신에게 왜 그리 '당연'한지 한 번 돌아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런 태도는 teferi님이 그리도 가치 있게 평가하시는 '과학'입니까, 아니면 '종교' 입니까. 저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숭상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연과학 역시 숭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특정 영역의 준거가 다른 영역의 준거를 압도하는 선험적 우월성을 지닌다는 식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준거를 밝히고, 그 준거에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합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즉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과학"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이는 그 논리 체계에 따라 십분 수긍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포퍼가 그런 식으로 주장하였고, 저는 포퍼의 논리 체계를 인정합니다. 그의 기준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과학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글과 같은 방식의 옳고/그름의 규정은 윤리 혹은 종교적인 판단일 뿐입니다. 선/악의 구분이 그러하듯 말이지요. 과학적 방법론에 의한 이론은 객관성-누가 관찰해도 같은 현상이 관찰됨-과 반복성-같은 조건일 때 같은 현상이 계속하여 나타남-이 만족됩니다. 이러한 특성은 천동설에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천동설 역시 하늘을 관측한 결과에서 이끌어낸 이론이기 때문이며 비록 한계가 존재하지만 지금도 대부분의 천문현상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객관성과 반복성은 과학이 가져야 하는 중요한 특성이고, 이 특성이 만족되기에 과학은 실생활에 이용할 수 있는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객관성과 반복성이 없다면 그 이론은 본인에게만 의미있는 뜬구름이론이 될 것입니다. 맑스주의는 어떨까요? 맑스주의는 객관성과 반복성이 없습니다. 같은 현상이라도 서로 다르게 해석합니다.(맑스의 공산당선언, 레닌의 제국주의론, 마오의 농민혁명론과 같이 혁명을 다르게 해석) 자본주의의 발전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미발전지역에서 오히려 공산당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윤은 자본의 노동착취라는 이론이 있으나 20세기에는 이윤과 노동소득 모두 높아졌다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객관성과 반복성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단지 anormaly를 편입시킨다고 하여 과학과 동등하다고 불릴 수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미신도 anormaly를 편입합니다! 그 메커니즘은 유사과학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임시방편 가설을 통해서입니다. 객관성과 반복성이 만족되지 못하는 이론을 임시방편 가설로 때우는 것입니다. 맑스주의도 이와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맑스의 이론을 정면으로 검증하지 않고 수많은 임시방편가설로 때우는 것이 맑스주의의 현실입니다. 관찰의 이론 의존성 명제로 “누가 관찰해도 같은 현상”에 기반을 둔 소위 ‘객관성’에 대해 의문을 제시했습니다. 읽지 않고 답을 하시는 겁니까. “진리”라는 개념이 지닌 속성을 말하며, 진리란 “실생활에 이용할 수 있는” 것이 그 준거가 아님을 제시했습니다. 읽지 않고 답을 하시는 겁니까. 자연과학과,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포함된 사회과학 영역이 서로 다른 이유―물론 전부는 아닙니다―를 설명하며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차이가 ‘틀림’이 아니라 '다름'이라고 제시했습니다. 동일하기 때문에 대등한 것이 아니라, 기반부터 '다르기' 때문에 대등 비교가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동등”하지 않다고 해서 틀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읽지 않고 답을 하시는 겁니까. 영역 별 준거의 차이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이 역시 영역 간 연구대상의 차이 등 '다름'에 기인합니다. 말씀하시는 “객관성과 반복성”이 자연과학영역 내에서 지니는 중요성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특정영역의 준거를 타 영역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들이대며 이를 준거로 옳고 그럼을 재단하는 것은 '폭력'에 가깝다고도 말했습니다. 읽지 않고 답을 하시는 겁니까. 최소한 제 말들에 대한 응대를 포함한 답변을 기대합니다. 대화란 응당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틀렸다면 지적해 주십시오. 자연과학적 준거를 동일하게 적용해도 그 유효성을 여전히 확보한다는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과학이다”라고 주장하는 방식에 대해서라면 본문과 덧글들의 논리를 가지고 나름의 비판은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제가 위와 같은 층위의 논의를 끌고 들어온 것은 본문과 덧글들의 논의가 저 영역까지 건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거기까지 고려하지 않고 대담하게 주장하셨던 것이겠지만, 저런 지점에 대해 나름의 응답을 가지고서야 주장하실 만한 층위의 문제입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틀렸다”라는 주장은 말입니다. 자연과학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틀렸다'면, 같은 논리로 모든 인문사회과학을 '틀렸다'고 말하게 됩니다. 철학을 부정하고 역사학을 부정하고 문학을 부정하고 정치학을 부정하고 사회학을 부정하는 셈입니다. 하지만 저는 본문과 덧글들이 전적으로 그러한 생각을 담고 있다고는 생각하진 않습니다. 자연과학만능주의자이며 자연과학숭배자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정 부분에 있어서는 자연과학의 방식을 신성시하는 부분이 없다고 말하고는 저 위와 같은 글과 맹신적인 옳고/그름 구분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이론, 더 넓게는 학문 영역이 explanation/understanding 중 어떤 것, 혹은 복합적인 양자 모두를 추구하는가의 문제로도 확장됩니다. 19세기 자연과학적 연구방식은 순수한 인과적 '설명'입니다. '원인'을 찾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은 이와 더불어 '이유'를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고려가 필수적입니다. (자연과학/사회과학의 '다름'에 대한 저의 제기도 이 지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meaning의 문제가 개입하기 때문에라도 자연과학이라는 특정 영역에 대한 동등성이 옳고/그름의 절대적 준거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제 지식이 일천하고 말글 솜씨가 부족해 제대로 설명을 못하고 있는 점이 독자의 이해를 방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해서, 관련한 내용을 담은 논문 한 부분을 발췌(http://archum20.egloos.com/4275239)해 두었으니 이해를 도울 수 있길 바랍니다.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이 ‘다른’ 이유들 중 하나로서 나름 유효한 주장이라 생각합니다. 사회과학 영역과 자연과학 영역의 차이를 계속 부각하는 이유는 대상과 조건의 차이에 따른 유효한 방법론 및 판단의 준거의 차이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즉, 자연과학 영역이 사회과학 영역에 비해 본원적으로 우월하여 그 방법론이 옳고 그름의 준거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미처 고려하지 않고 있는 지점을 상기하기 위함입니다. 단일한 목소리를 내는 집단에 신뢰성이 부여되고, 마치 옳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집단에 단일한 목소리를 가능케 하는 것은 각각의 영역이 지니는 특성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를 무차별 배제하는 방식의 논거는 권위적인 것을 넘어 폭력적인 수준입니다. 사람을 죽여야만 폭력이 아닙니다. 과학과 “동등”하지 않다고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과학주의적 혹은 더 근본적으론 조야한 수준의 논리실증주의적 사고입니다. 거기에 “실생활에 이용” 가능해야 ‘진리’라는 식의 매우 참신한 실용주의적 진리관까지 포함한 주장이 합쳐지니 본문과 같은 특정 이론을 ‘틀렸다’고 하는 것을 넘어 ‘죄악’ 운운하는 유사-종교적인 주장이 구축되는 것입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논의의 범위를 줄인다면 나름 유효한 주장일 수 있는 논점이긴 합니다. 무엇이 “과학”인가에 대한 논의라든가,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특정 집단의 행태에 대한 비판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은 매우 거대하며 극단적이므로 그만큼 다양한 층위에서의 반문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제가 제시하는 지점들은 그러한 반문들 중 단 하나에 불과합니다. 앵무새처럼 자기 기준에 의거한 좁은 주장만 반복하지 말고, 제가 제시한 질문들에 대한 나름의 응대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 기준 자체에 대한 질문들 말입니다. 덧, anomaly에 r은 없습니다. 현실적인 과학연구가 관찰의 이론 의존성에 의해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다른 연구와 동등하게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지요. 세계의 구성원리에 대해 음양 오행설, 사원소설, 이기론 등이 있었습니다. 이런 이론은 그 차이가 극심하며 어떤 공통점도 없습니다. 그러나 원자론이 도입된 이후 모든 과학적 이론은 수렴하여 원자설을 지지하게 되었고, 원자설의 기반 하에서 화학이 나오고 양자역학 표준모형이 나온 것입니다. 물론 원자론을 연구하는 사람은 원자론을 인식하고 있기에 원자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을 것이며 주류 학계의 권위가 원자론에 따를 것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정말 옛날 옛적 누가 세상은 음양과 오행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더라 에서 출발하는 음양 오행설과 동등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누가 관찰하든지 거의 비슷한 값을 가지는 원자설 이론과 관찰자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나는 음양오행설은 매우 큰 차이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물의 전기분해를 통해 물이 수소와 산소라는 두 기체의 화학적 결합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으나 어떤 사물이 오행중 어느 성질을 가지고 있기에 오행 중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는 어디와는 대립하고 어디에 약하다는 사실은 관찰자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내는 것이죠. 같은 사물을 어느 사람은 水성질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地성질이라고 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니까요.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에서는 관찰의 이론 의존성에 대한 과학자 스스로의 철학적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관찰이 이론에 의존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관찰이 아니게 된다는 하이젠베르크의 고민을 아인슈타인이 이론이 없으면 관찰도 없다고 간결하게 정리해 버리죠. 왜냐하면 이론이 없으면 현상의 어떤 측면이 의미가 있는지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관찰의 이론 의존성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인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완전히 오류로 끝나는 것은 아니며 다른 과학자가 계속 검증하면서 오류를 시정해 나가는 것이죠. 겉보기에 권위가 작용하고, 이론에 의존하며 anomaly를 포섭하는 권위적 실천이라고 하여 과학이 객관적이지 않고 반복성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교재, 같은 이론으로 배워서 bias가 작용한다 할지라도 세계 어느 누구나 과학에서 규명한 것을 거의 비슷하게 재현이 가능합니다. 물은 세계의 구성요소가 아니라 수소와 산소라는 것, 누구든지 전기분해로 재현이 가능합니다. 이것이 교과서에서 배워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실험으로 재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물이 오행중 水인지 金인지 木인지 土인지는 아무리 같은 교과서에서 배우더라도 결코 동일한 관찰결과을 보일 수 없습니다. 이 두가지는 결코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같이 이론에 의존하더라도 과학이 아니면 서로 다른 결과가 쉽게 나오는 것입니다. 아르님이 말씀하시길, 과학 활동에서 “관찰”의 결과가 동일한 것은,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동일한 가족유사성을 공유하지 못한 “관찰”들을 ‘틀린 것’으로 배제하는 권위적인 활동이 매우 체계적으로 일어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라고 하셨지요? 일단 어려운 개념을 사용한다고 해서 주장의 논거가 강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유사성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언어에 성립되는 개념입니다. 우리가 말(言) 이라고 할 때 말(言)이라고 부르는 것에 가족유사성, 즉 어떤 특성은 같고 어떤 특성은 같지 않지만 같은 특성때문에 한데 묶어서 말(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실 이건 평상시에 의식하지 않아도 항상 쓰는 것이고 특별한 논의 이외에는 나올 이유가 없는 개념입니다. 동일한 결과라는 단어를 쓸 때 이미 가족유사성이 만족되는 경우라는 가정, 인식을 전부 하고 있으며 이 가족유사성이 만족되지 않는 말이 오히려 희귀할 것입니다. 고로 어려운 말을 사용했으나 필요없는 동어반복에 불과합니다. 그냥 동일하지 않은 결과라고 인식한 것을 틀린 것으로 배제했다는 주장이면 됩니다. 그리고 이론과 오차의 크기를 간과하였습니다. 만일 이론이 올바르지 않다면, 즉 체계적 오류가 있다면 오차의 크기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원래의 이론이 옳다는 전제하에 새로운 이론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일 세계가 4원소로 이루어져있는데, 주류 과학계가 돌턴의 원자설에 맞는 연구결과만 참이며 다른 결과는 과학적으로 엄밀하지 못하므로 거짓이라고 권위적인 실천을 하면 어떠하였을까요. 당장 화학과 물리학이 성립하지 않을 것이며, 생물학, 천문학등 수많은 학문의 이론이 성립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오류를 덮기 위해 어마어마한 통제를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가능한가요? 그렇지 못하다는 겁니다. 거짓이론은 초반에는 오차가 작으나, 나중에 이론이 확장될때는 오차가 엄청나게 증가합니다. 그리고 그 증가한 오차를 님이 말한대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권력과 비용이 필요합니다. 세계가 그러한 통제로 가득 차 있나요? 그 누구 그 어떤 조직도 기하급수적인 오류를 계속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과학적 연구에도 나름의 한계가 존재하지만 그러한 한계가 과학자 세계 전체로 확대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실생활에 응용가능한 것만이 진리가 아니라는 주장도, 그럼 무엇이 진리이며, 진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하는 좀더 깊은 질문을 던져보면 거짓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리가 사전적 의미의 진실되고 올바른 것이 진리라면 그런 진리가 존재하는 것인지 어떤 것을 진리라고 정의해야 하는지 우리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연구하는데 이론의존성과 같은 나름의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고로 사전속의 진리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진리라는 말을 써야 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한 대비이며 고로 진리라고 정의된 것을 사전적인 정의 진실되고 올바른 것이라고 보고 따르며 진리에 포함되지 아니한 것은 배척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쓰는 것입니다. 이 세계에 사전적인 진리와 그렇지 않은 것만 나눈다면 그렇지 않은 것이 이 세계에 전부 포함될 것이며 사전적인 진리는 생각속에서 존재할 것입니다. 그럼 따를 것도 배척할 것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따르면 매우 높은 확률로 의도한 결과를 얻는 이론이 있으며 따르면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나올 확률이 매우 높은 이론이 있습니다. 이런 두 이론이 존재할 때, 어느 쪽을 취하고 어느 쪽을 버려야 하는가 하면 당연히 후자입니다. 그래서 전자를 진리라고 칭할 수 있고 후자는 진리가 아니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진리라는 말이 이용해야하는 것과 이용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는 명칭으로 사용될 수 있기에 - 이때에 가족유사성 개념이 필요한 것이겠지요 - 이용해야 하는 이론을 진리로, 이용하지 말아야 하는 이론을 진리가 아닌 것으로 배척해야 하는 겁니다. 이런 일련의 주장이 폭력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검증되지 아니하고 올바른 결과를 얻지 못하는 이론을 퍼트려 상태를 더 악화시키는 사람들이 타인에 대한 폭력을 행하고 있는 겁니다. 말기암을 선고받았다고 한약치료에 매달리게 하는 사람, 암을 치료할 수 있다고 각종 자연요법을 권하는 사람, 노동자의 천국이 될 것이라며 사회주의혁명을 선동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모두 폭력을 행하고 있으며, 이를 몰아내는 것이 곧 폭력을 막는 겁니다. 자연과학과 다르다는 이유로 틀렸다면 거의 모든 인문사회과학을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다르다가 무조건적인 동등성으로, 무언가를 틀리다고 말하는 그 자체가 틀렸다는 어설픈 똘레랑스 논리는 옳은 것도 그른 것도 부정하는 거대한 거짓논리입니다. 인문사회과학은 이론의 예측력을 높이기 위해 자연과학의 연구방법론을 도입했으며 그런 연구방법론을 도입하지 못한 학문은 예측력이 현저하게 낮고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윤리학과 구분되는 정치학을 새로 열었다지만 군주론은 철저하게 성공한 군주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관찰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기존의 윤리학 정치론은 성공하지 못한 반면 마키아벨리즘은 아직도 유효한 이유는 바로 현실관찰, 과학적 방법론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심리학도 본격적인 학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과학적 실험과 관찰을 도입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론이 맞다, 틀렸다는 그 자체의 판정도 결국은 이론의 예측가능성, 즉 현실에서의 재현성 또는 반복성이 만족하느냐로 판단하게 되며 그 재현성이 이론을 만든 본인만 만족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만족하기 위해서 객관성이 필요한 겁니다. 즉 과학적이론의 덕목이 필요한 것이고 이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이 과학적 연구방법론입니다. 역사학처럼 이론을 만들지 않는 학문이라면 모를까, 어떤 이론을 만들려고 하는 학문이라면 반드시 과학적연구방법론을 도입해야 하며 과학적인 검증을 거쳐야 하는 겁니다. 말이 반복되는 이유는 보유한 틀 자체가 다르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관찰의 이론 의존성은 '오류'가 아니라, 그 자체로 과학 활동의 토대입니다. 이론이 관찰과 합리성으로 구축된 올바른 것과 대립되는 것으로 보는 틀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과학 활동을 가능케 하는 지점이 바로 이 이론―패러다임―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때문에 “다만 그것이 완전히 오류로 끝나는 것은 아니며 다른 과학자가 계속 검증하면서 오류를 시정해 나가는 것”같은 방식의 생각도 바뀌어야 된다고 봅니다. 이런 면에서 “어느 누구나 과학에서 규명한 것을 거의 비슷하게 재현이 가능”한 것도 비슷한 패러다임을 공유하는 전제 하에서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과학이 지닌 그 “객관성”과 “반복성”이 본원적인 것이 아니라 그 역시 이론의존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객관성”과 “반복성”이 본질적인 무언가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실천의 비합리적 토대인 이론―패러다임―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이는 결국 이 패러다임을 구축하고 공유하며 지속 강화하는 집단의 실천 양식에 한 가지 특징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다른 종류의 집단 실천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는 말이지요. “진리”에 대하여 그것이 본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과학의 “객관성”과 “반복성”은 마치 본원적인 것처럼 말씀하시는 부분에 있어서 의아함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어려운 개념을 사용한다고 해서 주장의 논거가 강화되는 것” 이라고 주장한 적도 생각한 적도 없으니 이런 말씀은 굳이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가족유사성 개념이 나오는 것은 제가 말한 바가 “동일하지 않은 결과라고 인식한 것을 틀린 것으로 배제했다는 주장”의 층위가 아니가 때문입니다. 이는 말씀하신 “동일하지 않은 결과”라는 인식이 어떤 방식으로 구축되는가에 관련하는 지점입니다. 즉,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 닫힌 계로서 모든 case들을 미리 사전에 재단하여 포함하는 외연적 의미론이 아니라 일종의 case 별 가족유사성에 의거한 한정주의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진리'라는 절대적 준거가 아니라 '가족유사성'에 의거한다는 방식의 설명은 '주장의 논거를 강화하기 위한 어려운 말 사용'이 아니라 두 가지 상이한 방식을 제시하는 구체적인 설명입니다. 방점은 동일성 자체가 아니라, 이 동일성의 기준이 되는 상이한 두 가지, 즉 절대적 준거로서의 “진리”와 실천 영역에서 구축되는 가족유사성의 차이입니다. 이 논의가 왜 굳이 등장하는가 하면, 과학자 집단의 실천에서 발견되는 소위 “객관성”이나 “반복성”이 바로 (이론 의존적인) 가족유사성 구축 과정에 기인하며, 그렇기 때문에 소위 “객관성”이나 “반복성”이 옳은 것의 준거이고 이에 반하여 '이론 의존적' 지점이 그른 것이라는 대립 틀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가족유사성 개념은 제가 윗글에 대해 제기하는 반론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어려운 개념을 사용해 주장의 논거를 강화'하겠다는 식의 유치한 생각의 발로가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보았다는 것 자체가 제가 제시한 틀을 이해하지 못했다는―혹은, 않았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과학 활동의 비합리적 토대를 주장한다고 하여 과학이 관찰에 기반하여 구축하는 합리적인 체계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토대와 체계 간의 대립 구도, 즉 위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론의존적 속성에 의해 구축된 '오류'를 과학자들이 검증하여 시정한다는 방식의 틀을 부정할 뿐입니다. 과학 활동의 토대로서 작동하는 권위는 단순히 과학자들의 조직적인 통제 권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패러다임은 그런 식의 개념이 아닙니다. 토마스 쿤에 의하면 말씀하신 것처럼 기존의 패러다임에 반하는 anomaly 들이 계속 발생할 때 더 이상 이를 억제하지 못하는 기존의 패러다임은 붕괴합니다. 이것을 말씀하신 것처럼 '통제'라고 본다면, 그 통제는 어느 지점까지는 가능하나 이후에는 불가능하다는 기술입니다. 4원소설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 대해 저 또한 동의합니다. 제가 동의하지 않은 것은 현재의 이론 체계가 최선의 체계라는 지점입니다. 이전의 패러다임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현재의 과학지식체계 또한 어느 순간 패러다임의 전환을 맞이하지 않는다고 감히 어떻게 보장할 수 있습니까. 또다시 전복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가능하다면, 현재의 체계가 이전 패러다임에 비해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현재의 과학지식체계가 마르크스가 말한 공산주의와 같은 인류 진보의 최종형입니까? 이를 담보하지 못할 경우 현재의 과학지식체계 또한 상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자연과학자 집단의 지식체계나 방법론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우위를 부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유용성과 설명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누차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실생활에 응용가능한 것만이 진리가 아니”라는 게 아니라, 진리라는 개념이 그런 식으로 구축되고 공유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식의 담론에서 통용되는 '진리'는 국어사전의 개념이 아니라 철학의 기초 개념입니다. “진리가 존재하는 것인지 어떤 것을 진리라고 정의해야 하는지”는 철학 영역에서 오랫동안 다루고 있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인지와 실천의 한계를 자각하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하여 인간의 인지와 실천의 영역 내에만 모든 것이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에 대한 위와 같은 주장은 개념적으로 인간의 인지 밖의 존재의 신은 결코 검증할 수 없으니 신은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개념일 뿐이라고 말하는 바와 다르지 않습니다. 상상속에만 존재한다 즉,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로 말미암아 그 존재를 확언할 수 없다'는 생각과는 다릅니다. 무신론과 불가지론의 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불가지론은 자기 한계에 대한 명확한 인식으로 확언을 보류하는 것이지만, 무신론은 신이 없다는 강한 믿음으로 신이 있다는 믿음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신앙입니다. 진리에 대해서도 그것을 인지할 수 없다는 말이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언하는 명제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나름의 믿음이 매개를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믿음’은 일반적으로 공유되는 믿음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진리’에 대한 불가지론자라면, 이는 굳이 ‘진리’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류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기존의 진리 개념을 실용주의적 진리관으로 치환해야 하는 정당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진리라는 말은 공유되고 통용되는 기존의 개념으로, 실용적인 것은 그냥 실용적이라고 쓰시는 편이 소통에 더 유용합니다. [동일하기 때문에 대등한 것이 아니라, 기반부터 '다르기' 때문에 대등 비교가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동등”하지 않다고 해서 틀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건 바로 윗 덧글에서 그냥 가져왔습니다. 자꾸 동등성을 말씀하시는데, 저는 대등하다는 말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즉, 비교 가능한 상태에서 같은 급이라는 말이 아니라, 비교 자체가 가능하지 않은 상태이기에 고하가 없다는 말입니다. “다르다가 무조건적인 동등성으로, 무언가를 틀리다고 말하는 그 자체가 틀렸다는 어설픈 똘레랑스 논리”라고 비아냥대시려면 최소한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나 하십시오. 다시 말하지만 ‘동등’하다가 아니고 ‘대등’하다입니다. 또한, 무조건적으로 동등하다고도, “무언가를 틀리다고 말하는 그 자체가 틀렸다”는 식의 말을 하지 않기 위해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다른’ 이유에 대해서도 나름 열심히 기술했고, 제 미비한 말글 솜씨를 보완하기 위해 발췌까지 해서 링크해 드렸습니다. 애초에 다른 준거를 지닐만한 조건의 차이가 있는 영역 간에 다른 준거를 대야 한다는 말과 조건의 차이 따위는 무시하더라도 한 가지 준거로 환원해야 한다는 말 중 어느 쪽이 더 폭력적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구체적으로 질문하자면, 제가 제시한 (그리고 링크해 둔 글에도 나온)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연구 대상의 차이’를 무시하고 자연과학 영역의 준거에 모두 맞춰야 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입니까? 왜 있는 차이를 없는 것으로 치부해야 합니까? 이를 무시하고 여전히 자연과학의 준거만을 고집하기 위해서는 차이가 있다고 한 저의 주장에 대해 차이가 없다고 반박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근대 자연과학 체계는 그 설명력과 예측력의 측면에서 명시적으로 상당한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누구도 쉽게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때문에 다양한 영역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많은 부분에 있어 자연과학의 방식을 모사하기 위한 타 영역의 시도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에 대한 자기 성찰과 자연과학과는 다른 영역의 특성에 대해 간과한 지점에 대한 반성 또한 이후 이루어져 왔습니다.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오히려 연구 대상을 곡해하고 제대로 된 이해를 방해하며 체계적인 오해를 구축한다는 식의 자가 영역에 대판 비판도 충분히 많습니다. “예측력”이라는 것이 학문의 유일한 목표라는 주장은 정계나 재계에서 학계에 강요하고 있는 태도일지언정, 다양한 영역의 학자 공동체가 모두 공유하고 있는 생각은 결코 아닙니다. 학문의 목적은 “예측”과 이에 따른 “실용”만이 결코 아닙니다. 왜 “예측”외의, 가령 “이해”하고자 하는 학자들의 다른 목표는 애초에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학자공동체의 일원도 아닌 상황에서 스스로에게 어떤 이유로 학자 공동체의 단일 목표를 (영역별 차이에 대한 고려조차 배제한 채) 멋대로 설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한 가지 뚜렷해지고 있는 점은, 실용성이 곧 유일한 가치라고 생각하시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심지어 “진리”까지도 실용적으로 보는 분이시니. “과학적이론의 덕목”이라고 표현하신 부분도 왜 그것이 덕목이냐 물으려 하다 답이 이미 들려 말았습니다. 그게 ‘실용적’이니까 라고 하시겠지요. 예를 들어 주신 부분들에서 소위 말하는 ‘성공’ 했다거나, ‘본격적인 학문’이 되었다거나 하는 것은 결국 해당 영역 내, 혹은 제도권 내 인정투쟁에서 승리했다는 말로 보겠습니다. 하지만 과학적 방법론을 따르지 않는 학문 영역, 혹은 이론 사조 또한 여전히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은 많습니다. 철학이나 역사학, 문학 등 인문학 영역에서 ‘성공’한 사상, 이론은 모두 과학적 방법론을 따릅니까? 사회과학 영역, 특히 사회학 영역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은 또 어떻습니까. 더 넓게는, 철학이나 역사학은 여전히 본격적인 학문 영역으로 엄존하는데, 이들은 자연과학과 다른 방식의 학문 영역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즉, 말씀하신 예들은 과학적 방법론이 본질적으로 우월하며 그것만이 가치 있다는 방식의 주장과는 무관합니다. 오히려, 자연과학과, 이 영역의 방식을 모사한 특정 사조 및 이론들이 현재 나름 높은 위상을 지니게 된 사회문화적 조건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즉, 말씀하시는 “예측력”과 이에 기반한 ‘실용성’이 어떤 사회문화적 조건에 의해서 이 사회에서 우월한 가치로 추구되고 있는지 말입니다. 실용적인 것은 실용적인 것입니다. 본질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도 아니고, 초월적이고 선험적인 우월성도 아닙니다. 과학적 방법론은 나름의 예측력을 구축하여 도구적 실용성을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그 유용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뿐입니다. 그것이 이론이나 학문 영역의 가치를 판단하는 ‘유일한’ 잣대라고 말하는 것은 학문 영역의 차이에 대해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아니면 무지하기 때문이 할 수 있는 주장일 뿐입니다. “역사학처럼 이론을 만들지 않는 학문이라면 모를까” 하는 말은 철회하셔야 할 듯합니다. 역사이론이란 것이 있습니다. 보수적인 제도권 교육 체계 내에서도 ‘역사학 이론’이란 말을 쓰고 있군요. 물론, 여기서도 학문 영역 간 차이를 모두 배제한 체 인과적 설명과 예측만을 목적으로 하는 좁은 의미의 자연과학적 이론만을 말씀하시고자 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아르님은 맑시즘이 미신과 비교하여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하군요. 제 질문들에 대한 답 없이 다른 질문이 돌아오는 것이 약간 탐탁지 않지만, 저라도 먼저 답을 하면 제 질문에 대한 답도 돌아오리라 기대하며 답변을 하겠습니다. “맑시즘이 미신과 비교하여” 무엇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 역시 무엇을 준거로 삼아 어떤 층위에서의 비교를 말하는지를 우선 밝혀야 유효한 질문입니다. 세계와 실재는 단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신’이라고 말하면 그 범위가 모호하고, 나아가 단어 자체에 부정적인 함의가 들어 있으니, 이하는 한국 사회에서 쉽게 ‘미신’이라고 일컫는 무속 신앙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이들은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하여 서로 다른 실천 양식을 공유한 집단들의 실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사회과학영역에 속해 있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사회과학자들의 장 내에서 다른 이론들과 그 적절성과 설명력, 내적 체계의 탁월성 등의 준거에 의하여 비교 우위를 평가 받습니다. 어떤 이론이 뛰어난가에 대한 인정은 장 내 참여자들의 인정에 의해 구축되는 것입니다. 같은 의미에서 어떤 무속인이 뛰어나며 누구의 ‘신내림’이 더 탁월한지에 대한 평가는 무속 신앙의 장에 속한 이들이 상호 평가할 일입니다. 외부자는 이에 대한 평가를 내릴 만한 실천적 지식을 체화하고 있지 못합니다. 서로 다른 영역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양자에 대한 비교 우위 평가는 타당하지 않습니다. 서로 상이한 조건 하에서 서로 상이한 실천을 하는 두 영역이라면 (동등한 것이 아니라) 대등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제게 “맑시즘이 미신과 비교하여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지”를 묻는다면 저는 일단 그 비교 기준을 돌려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특정한 준거가 없이 그 자체의 본질적인 비교 우위에 대해 묻는다면, 저는 서로 상이한 영역이 대등한 만큼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무속 신앙에 비해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고 답하겠습니다. 예/아니오로 답할 수 있는 질문에 굳이 말이 길어진 것은 오해를 피하기 위함입니다. 합리주의, 혹은 과학주의 시대에 비과학성을 내포하는 ‘미신’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부정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迷(미혹할 미) 자를 쓰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미신에 대하여 상대적 우월성을 주장하지 않는 것은 비교 대상에 대하여 이러한 부정적인 함의를 함께 덧씌우는 것으로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계와 실재의 종류와 층위가 다양하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소위 ‘미신’이 지닌 부정적인 함의 또한 하나의 단면일 뿐입니다. 특정한 층위의 준거를 제시한다면 상이한 영역도 비교는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무속과 카운슬링이라는 상이한 영역에 대한 비교도 특정한 기준을 제시한다면 가능합니다. ‘미신’이라 불리는 무속에 기대 점을 보러 가는 (혹은, 나아가 부적을 쓰는) 행위는 합리주의-과학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부정적인 인상을 주지만, 삶의 예측불가능성이 주는 불안감을 어느 정도 타파하고 나아가 자신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공개하고 타인의 시선을 통해 (비록 좁은 의미에서지만) 탈주관화하는 과정에서 자기 생각과 생활을 성찰하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합리주의가 더욱 강한 서구 사회의 일상적인 실천들 중 하나인 카운슬링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위에서 제시한 기준에 의하면 무속 신앙과 카운슬링이라는 서로 상이한 영역에 속해 있는 (혹은, 있어 보이는) 두 가지 집단적 실천 양식에 대해서도 상호 비교가 가능하게 됩니다. 만약 누군가 무속 신앙과 카운슬링에 대해 묻는다면 저는 이러한 측면에서 기능적으로 등가에 가깝다고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무속 신앙에 대한 질문에서도 특정한 준거를 제시한다면 답을 하는 것이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특히 마르크스주의의 경우는 더욱 그러한데, 칼 마르크스의 저작은 (아무리 그 자체로서 ‘과학성’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체계적인 부분만큼이나 교조적인 부분도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굳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이라고 한정지어 계속 논의를 이끈 것은 사회과학 영역, 즉 학문의 영역에 속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인 지점에 한정지어 이야기를 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주의가 내재한 다양한 층위만큼이나 이를 준거로 활동하는 영역도 어느 정도 분화가 되어 있습니다. 사회 활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나 국가 체제의 기반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까지 있을 정도니까요. 다만, 이론 체계로서의 마르크스주의 역시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사회과학 영역에서 여전히 주요한 패러다임으로서 한 축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명확히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계속 말을 하지만, 본문부터 덧글까지 일관되게 발견되는 오류는 이러한 다양한 층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혹은,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비판의 소지가 있으며, 그 때문에 제가 긴 덧글들로 계속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아르님은 자연과학도 필연적으로 권위적으로 내적 체계화가 진행될 수밖에 없으므로, 현재 맑스주의의 이론전개방식이 권위적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실만 가지고 옳다 그르다를 판단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다 할지라도 맑스주의는 여전히 그르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권위적인 정도에 있어서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신 또는 무속을 질문드린 것은 그 이유입니다. 그렇게 권위적 체계화의 공통점만 강조한다면, 자연과학과 맑스주의와 무속은 대등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르님은 어떤 준거점이 없이 비교한다면 세가지는 모두 대등하다고 답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과연 대등하다면 어째서 무속은 미신이라고 천시를 하고 사회과학은 약간의 권위를, 자연과학은 최고의 권위를 인정할까요. 그것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그 이론체계가 예측력을 가지고 있는가, 신뢰성을 가지고 있는가, 크게는 그 이론을 가지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준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측력이나 도구적 유용성이 우대를 받는 것은 근대의 주류적인 믿음과 권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의 원인을 알고 해결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사람의 욕구 때문인 것이며 그런 예측력과 유용성을 제공하지 못하는 이론은 그저 공리공론에 불과하며 연구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을 쏟을 이유가 없는 이론인 것입니다. 또한 그 도구적 유용성을 제공하기 위해 관찰과 이론수립에 그치지 않고 관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다른 원인의 영향을 제거하는 엄격한 검증절차가 필요한 것이며, 이러한 검증절차를 체계화된 것이 과학적 연구방법론입니다. 비록 사람의 사고구조상 자신이 교육받고 훈련받은 기존의 패러다임에 편향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에 anomaly로 인한 패러다임의 급격한 변화 대신 패러다임에 편입시키는 쪽을 선호하는 일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일종의 본질적 한계인 것이지 이 때문에 다 대등하다 이런 식으로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창조과학과 기성과학의 비교는 창조과학이 과학이 아니라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창조과학이 무슨 철학이나 세계관으로서 과학과 대등한 지위를 누릴 수 있지 않고, 창조과학이 완전하게 틀린 것입니다. 설령 기성과학이 비록 기존 패러다임에 대한 권위에 근거하여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는 증거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더라도 창조과학은 틀렸고 기성과학은 옳습니다. 왜냐하면 창조과학은 과학적 연구방법론을 적용하지 않고 성서에 대한 믿음, 권위에 먼저 근거하여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만 선택적으로 적용하고 나머지는 무시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기성과학은 현상의 진정한 원인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고 진정한 원인을 왜곡, 호도하는 기타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과학이론은 특정 요인의 변화에 따른 예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과학은 그렇지 못한데, 그 이유는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틀리기 때문'입니다. 창조과학은 기성과학이 정립한 검증과정, 즉 기타요인의 효과를 제거하는 것을 게을리 합니다. 그러하다는 의미는 곧 지적으로 불성실하다는 의미이며, 예측력이 현저하게 낮은 것이 단순히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창조과학은 사회과학과는 다루는 범위가 다릅니다. 그러나, 어떤 패러다임이 각자 나름의 한계를 안고 있더라도 그 한계를 넘어서는 패러다임이 없는 이상 각 패러다임을 대등하게 대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권위적이라는 말이 한 단어로 표현되더라도 그 의미는 자연과학과 창조과학에서 극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맑스주의에서 권위적이라는 의미는 창조과학의 그것에 가깝습니다. 맑스주의는 맑스의 주장에 대해 검증을 거치지 않고 개개인의 동의에 기반하여 논증을 펼칩니다. 창조과학도 성서라는 텍스트에 대한 개개인의 동의에 기반하여 논증을 펼치는 데 반해 자연과학은 이론과 이론을 설명하는 기존 실험의 결과에 기반하여 논증을 펼칩니다. 즉 권위의 근원의 오류가능성이 창조과학과 맑스주의는 크고 자연과학은 작은 것입니다. 서로 대등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학이 가장 옳고 창조과학과 맑스주의는 그른 것입니다. 사회과학은 자연과학의 엄격한 검증을 적용할 수 없기에 과학적 방법론이 적용되기 어렵다고 해도 오류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개발될 수 있습니다. 당장 맑스주의의 이론전개방식이 맑스가 말하기를~ 에서 벗어나서 역사적인 사실 xxx으로 증명된 맑스의 이론 yyy에 관하여~로 바꾸기만 해도 많은 오류를 줄일 수 있습니다. 만일 역사적 사실이 진정 맑스의 이론을 뒷받침하기 부적당하다고 밝혀진다거나, 맑스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사실도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실도 있었다거나 하는 것으로서 맑스의 이론 자체에 대해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주장을 반증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방법론이 오류를 가장 줄일 수 있는 방법론이지만 이를 채택하지 않는 것은 사회과학이라는 외피를 둘러쓰고 '우리는 그저 다를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맑스주의자의 지적 게으름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지적 게으름의 결과로 수천만명이 목숨을 잃은 사실을 볼 때 이 게으름은 커다란 오류이고 반드시 수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자연과학은 탈권위적이고 객관적이며 여타 영역은 오염되어 열등하다는 식의 느낌의 논의에서 벗어난 것은 기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 지점일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미 더 진행된 논거들을 제시했습니다. 이에 대해 답을 하신 후에 한꺼번에 답을 하겠습니다.
1. "구체적으로 질문하자면, 제가 제시한 (그리고 링크해 둔 글에도 나온)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연구 대상의 차이’를 무시하고 자연과학 영역의 준거에 모두 맞춰야 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입니까? 왜 있는 차이를 없는 것으로 치부해야 합니까?" 2. "학문의 목적은 “예측”과 이에 따른 “실용”만이 결코 아닙니다. 왜 “예측”외의, 가령 “이해”하고자 하는 학자들의 다른 목표는 애초에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학자공동체의 일원도 아닌 상황에서 스스로에게 어떤 이유로 학자 공동체의 단일 목표를 (영역별 차이에 대한 고려조차 배제한 채) 멋대로 설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이런 식으로 딱 집어 얘기하는 것이 모양새가 우스워 안하려 하는 참인데, 자꾸 대답을 안하시고 넘어가셔서 집어 놓겠습니다. 윗 덧글에서 제가 이미 한 말들 그대로입니다. 답을 기다립니다. 맥락은 위로 올라가 덧글을 다시 읽으시면 됩니다. 마치 예측력과 실용성을 "자신의 문제의 원인을 알고 해결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사람의 욕구"라는 식으로, 즉 본원적인 것으로 치환하여 절대적인 준거로 다시 만드시려는 듯한데, 저는 예측력이 지니는 효용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그것이 학문의 가치를 재단하는 단일한 기준일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다양한 집단에는 다양한 가치지향이 있으며 다양한 목표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학자 집단이 지닌 목표가 정치 경제계에서 학자 집단에 요구하는 목표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자꾸 자연과학적 의미의 '검증'을 말하시는데, 이 역시 연구대상의 차이 등 영역의 차이에 따라 자연과학 영역이 구축한 준거로서의 '검증' (그리고 이에 기반이 되는 소위 "객관성"과 "반복성" 등)이 영역 별 차이를 무시하고 절대적인 준거로서 추앙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여전히 제시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특정한 규범 및 준거가 여타 영역에 침투하는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권력의 문제입니다. 이 역시 위에 제 질문에 대해 답을 하시면 함께 다뤄질 수밖에 없는 지점입니다. 답변을 달아 주시면 (지금은 아직 적지 않은) 윗 덧글의 대한 내용과 함께 제가 답을 다시 하겠습니다. 한 가지만 우선 지적하자면 “즉 권위의 근원의 오류가능성이 창조과학과 맑스주의는 크고 자연과학은 작은 것입니다. 서로 대등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학이 가장 옳고 창조과학과 맑스주의는 그른 것입니다”는 주장은 철회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개념상, 옳고 그름은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실천의 영역에서 옳음에 포함된 것과 그름에 포함된 것 재단하는 일종의 가족유사성이 작동하겠지만, 이 경우 최소한 공유된 실천적 감각으로서 옳음과 그름에 대한 상호주관적인 준거가 존재해야 합니다. 그런데 벌써 제가 이 준거를 공유하지 못하며, 그 외에 또 많은 이들이 공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자명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teferi 님이 좋아하실 소위 ‘검증 가능한 객관적인’ 기준이라도 있어야 나름의 설득력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teferi 님이 “권위의 근원의 오류가능성”을 측정해 일정 수치 이상은 옳고 이하는 그르다는 식의 소위 ‘과학적’인 증거를 제시하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는 teferi 님의 능력을 평가절하한다기보다는 연구 대상의 속성에 기인하는 부분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를 진행하셔서 결과물을 제시하시면 읽어본 후 타당하다면 수긍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한 옳고 그름은 그 개념상 정도의 문제라고 주장하시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0 과 1의 명백한 차이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즉 권위의 근원의 오류가능성이 창조과학과 맑스주의는 크고 자연과학은 작은 것입니다. 서로 대등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학이 가장 옳고 창조과학과 맑스주의는 그른 것입니다”는 식의 주장은 철회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 역시 위에부터 반복적으로 지적한 것처럼 "예측력에 기인한 도구적 실용성이 더 크다" 정도로 축소해 주장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도구적 유용성 부분은 비교적 이견이 적은 범위에서 나름의 상호이해가 가능합니다. (논점일탈이지만 궁금해서 묻는건데, 역사 이론에 대한 부분은 철회하셨나요?) 사회과학 영역에서도 ‘검증’의 시도를 합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나 사회학자들에게 당신들은 아무런 검증의 시도도 하지 않고 “개개인의 동의에 기반하여 논증”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실례입니다. 다만 ‘검증’이라는 것이 자연과학적 방법과 다르고 혹은 자연과학적 방법론의 기준에 따르면 불충분해 보이는 지점이 발생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더욱 엄밀히 모사하려는 시도와, 그러한 시도가 지니는 맹점을 성찰하며 영역 간 차이에 따른 연구대상 및 준거의 차이, 그리고 그에 따라 발생하는 딜레마를 포착하고 나아가 나름의 방식으로 해소해보고자 하는 시도가 공존합니다. 이 역시 위에서 제가 한 질문과 연관이 있으니 답을 하시면 들은 후 마저 답을 하겠습니다. 이번 덧글은 내용이 약간 난삽하게 적힌 감이 있는데 양해 바랍니다. 퇴고를 못했습니다. 1. 첫번째 이유는 자연과학적 연구방법이 적용될 수 없다고 생각하던 많은 영역에서 자연과학이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심리학이 그렇습니다. 두번째 이유는 자연과학적 검증을 적용하지 않으면 어떤 이론이 옳고 어떤 이론이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장 시장주의이론과 맑스주의이론중에 어느 쪽이 더 사회를 잘 설명하고 있느냐는 물음에는 현실을 관찰하고 그 현실이 이론에 맞는지 살펴보고 이론의 변수 외에 다른 변화요인을 최대한 제거한 이후에도 현실이 이론에 일치하는지는 살펴보는것, 즉 과학적 검증 이외에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없습니다.
2. 어떤 대상을 이해했다고 주장하려면 예측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정 시기의 특정 사건에 대한 이해 이론이라면 무한대의 이론이 가능합니다. 이 수많은 이론중에 어떤 이론이 다른 이론보다 더 옳다고 주장하려면 이론이 주장한 바에 따라 예측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예측을 할 수 있는 이론과 할 수 없는 이론이 대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면 이 세상에 가치없는 이론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스파게티 괴물 신의 기적이라는 이론도 맑시즘과 대등합니다. 예측력이 있다 없다, 도구적 유용성이 크다 작다는 서로 대등한 이론의 특성중 하나가 아니라, 올바른 이론과 그렇지 않은 이론을 가르는 기준입니다. 다양한 집단에 다양한 가치지향이 존재한다는 것이 예측력이 낮은 이론에 면죄부를 주지는 못합니다. 맑시즘은 수많은 사회이론중에 자신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결국 맑시즘의 예측력이 더 낫다는 하나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일 예측력이 낮다면 예측력이 더 높은 다른 이론을 두고 맑시즘을 선택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정치경제계에서 예측력이 더 높은 이론을 선택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각 개인이 수많은 사회이론중 예측력이 더 높은 이론을 선택하는 것이 개인에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1-1. 이미 인정했듯 여러 영역에서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도입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말씀하신 심리학의 경우 특히 실험을 통한 경험연구가 두드러지는 분야입니다. 하지만 '성공'한 학문 영역 중 과학적 방법론을 차용한 분과가 있다는 점이 과학적 방법론을 성공의 원인으로 만들지 않듯 (동일하게 '성공'한 학문영역이 과학적 방법론을 차용하지 않았다는 반례를 듦으로서 위에서 제가 지적한 부분입니다), 자연과학적 방법론이 사용될 수 없을 것 같으나 사용되며 나름의 ‘성과’를 내고 있는 영역이 존재한다는―많고 적음의 문제는 아닙니다― 것은 마찬가지로 그것이 사용될 수 없을 것 같으며 사용되는 데 있어 문제제기가 있어 지배적인 방법론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분과 학문으로서 ‘성과’를 내고 있는 영역이 있다는 점에 의해 아주 간단히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 됩니다. 여기서 만약 ‘성과’를 ‘예측력과 실용성’에 국한하시려 한다면, 그 ‘예측력과 실용성’을 지향하지 않는 영역들, 일단 고전적인 인문학인 문학, 역사학, 철학은 틀린 것이며 무가치한 것이고, 나아가 이를 공부하고 지지하는 이들은 악한 것이고 주장하시고 있다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나아가 근대 학문의 기반이라는 사회학, 정치학 등에서 통제 실험이 불가능한 모든 사조들 역시 틀린 것이며 무가치한 것이라고 주장하신다고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Yes/No) 1-1-1. 지금까지의 논리적 흐름을 통해 유추해보건데 ‘Yes’라고 답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왜 ‘예측력과 실용성’만이 옳고 그름의 기준인지 질문하겠습니다. 위에서 말씀하신대로 “각 개인이 수많은 사회이론중 예측력이 더 높은 이론을 선택하는 것이 개인에 유리하기 때문”이라 하신다면, 문학, 역사학, 철학을 공부하기로 선택하고 그 안에서 특정한 흐름을 선택한 이들이 존재한다는 반례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 하실겁니까. 인간이 말씀하신대로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선택하는 존재라면 이들 또한 자신에게 유리한 선택을 했을 것입니다. (바로 ‘반증’하는 사례가 나왔으니 깔끔하게 입장을 기각하고 철회하시는 게 소위 “과학적”인 것 아니겠습니까?) 또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선택한 이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 하실겁니까? 아니면 설마 옳음의 기준이 단순히 더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 것이라고 하실 셈입니까? 1-1-2. 만약 ‘No’고 생각하신다면... 지금껏 한 말들의 논리적 일관성이 무너지는군요. 1-1. (계속) 사실, 말씀하신 '성과'에 대해선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이것이 단지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예측 모델 구축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는 보편적인 의미의 성과가 아니라 분과학문과 영역의 특성을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맞춰 주조한 결과 구축된 결과물일 뿐입니다. 이 역시 "예측력과 실용성만이 진리!"라는 식의 맹목적인 신앙이 없다면 긍정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오히려 자연과학적 모델링을 위해 특정한 요소들을 무시한 부분에 대해 성찰하지 못한 점을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심리학 영역의 경우 자극-반응에 입각한 스키너모델과 경험적 실험을 통해 자연과학적 방법론이 빈번히 쓰이는 영역입니다. 실제로 분과학문으로서의 심리학은 이러한 방식을 주류로 인정하며, 때문에 정신분석학 등 이러한 방식을 따르지 않는 방법을 자기 분과 내에서 배척하였습니다. 분과학문으로서의 심리학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자연과학적 방법론과 같은 실증주의적 방식을 준거로 삼고, 이를 일종의 주류로 인정하고 이에서 벗어나는 방식을 ‘틀린’것으로 규정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틀린’ 것이라는 말은 가능합니다. 왜냐면 해당 영역 내에서 나름의 공유하는 준거를 구축했기 때문입니다. 기준이 있다면 옳고 그른 것이 있지요. 이에 따른 ‘성과’도 있고요. 하지만 이 기준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 즉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도입함으로써 배제되는 요소들에 대해 무시한 채 그것을 '성과'라고 치장하는 행태를 성찰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해야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회과학 영역은 인간 행위를 설명하는 것을 학문의 주요한 목표의 하나로 삼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사물과는 달리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며 자신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 그 이유를 설명하는 존재입니다. 때문에 자연과학적 설명 방식, 즉 원인-결과의 방식만으로 설명한 결과가 연구 대상 자신이 스스로 밝힌 행위의 이유와 다른 경우가 왕왕 발생합니다. 연구자는 연구 대상자의 행위가 이러이러한 원인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 말하고, 연구대상자 자신은 그게 아니라 다른 이유로 이렇게 행동했다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연구자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어떻게 '검증'해야 합니까? 자연과학의 경우 연구대상의 스스로의 작용에 대해 자기합리화를 하지 않기 때문에, 즉 침묵하기 때문에, 판단은 전적으로 이를 보는 연구자들 간의 해석과 상호합의에 의존합니다. 실험에 의한 “엄격한” 검증이란 것도 결국 연구자들의 입장들에만 의존하는 실천이기에 가능합니다. 반면, 연구 대상이 인간인 경우 대상은 스스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이유를 말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 경우 (연구자 또한 대상자들과 동일한 인간이기에) 판단의 근거가 오롯이 연구자에게 귀속된다고, 즉 연구자의 인식론적 특권(우월성)을 무조건 주장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물론, 오랫동안 사회과학자들은 이러한 연구자의 인식론적 특권을 주장해왔고, 여전히 그러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는 연구 대상의 차이에서 오는 특성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식의 자기 성찰적 비판이 학계 내부에서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도입한다면 '스스로의 행위에 대한 이유를 제시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연구 대상의 속성을 원천적으로 무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러한 식의 연구 대상에 대해 임의적인 배제를 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에 대한 답이 “그래야 그나마 예측 가능하고 실용적인 결과를 생산할 수 있으니까” 라면 이 역시 위의 1-1-1. 로 이어지게 됩니다.) “자연과학적 연구방법이 적용될 수 없다고 생각하던 많은 영역에서 자연과학이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답이 되지 못합니다. 1-2. 맞습니다. 옳고 그름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기준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제가 물은 것은 이런 층위가 아니었지요. 저는 근대 학문으로서 최소한 현실정합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전제를 이미 공유한 채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장 시장주의이론과 맑스주의이론중에 어느 쪽이 더 사회를 잘 설명하고 있느냐는 물음”에 성경과의 정합성에 따라야 한다는 식의 말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지금의 논의는 그런 차원을 말하고 있진 않습니다. 제 질문은 왜 자연과학적 방법론이 단일한 준거로서 작용해야만 하냐는, 더 들어가서는 그리 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점입니다. “현실을 관찰하고 그 현실이 이론에 맞는지 살펴보고 이론의 변수 외에 다른 변화요인을 최대한 제거한 이후에도 현실이 이론에 일치하는지는 살펴보는 것”에 대해서 일차적으론 관찰의 이론의존성으로 그 객관성이 상호주관성임을 제시했으며, 나아가 변수요인들에 대한 통제가 정당한가, 즉 인문학 및 사회과학 등의 여타 영역의 연구 대상이 자연과학의 연구 대상들처럼 탈맥락적인 존재로 환원하여 실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가 (여기에는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를 말했습니다. 연구 대상인 인간이 자기 행위에 대해 이유를 제시하는 상황은 자연과학 영역 내에서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조건이지만, 맥락의존적인 의미세계를 탐구하는 영역에서는 결코 배제할 수 없는 지점입니다. (물론 이 외에도 영역 별로 다른 차이들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만, 저는 제가 그나마 조금 아는 영역에 기대어 설명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저는 이런 지점들을 굳이 무시해야만 하는 이유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기서도 지금까지처럼 ‘예측력과 실용성’만이 가치 있고 옳은 것이며,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모델이 이를 가장 잘 구축하므로 그래야 한다고 말하시려 한다면 여기서도 위의 1-1-1. 로 연결될 것입니다. 2. 이해란 곧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은 ‘이해’에 대한 과도한 축약 정의입니다. 가령, 막스 베버 이해(verstehende)사회학의 ‘이해’도, 빌헬름 딜타이의 ‘이해’도 “이해했다고 주장하려면 예측을 할 수 있어야”한다는 식의 주장에 대한 반대 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계속 반례를 드는 것은, 포퍼적 과학관에 가까운 분이신 듯하니 제가 ‘반증’을 하면 깔끔하게 스스로 ‘기각’하시리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아주 조야한 예지만, 어떤 논문을 ‘이해’ 했다 주장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애초에 여기선 무엇을 ‘예측’해야 할까요?― 논문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거나 이를 자기 논문의 reference로서 적절하게 사용하는 등의 방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의미세계에 대한 접근인 이해를 “예측” 하나로 단순화하려는 시도는 저 뿐만 아니라 기존에 ‘이해’에 대해 고민한 학자들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개념은 주관적인 것이 아니고 상호주관적인 것입니다. 고로 2번에 대한 답이 되지 못합니다. 이제 위의 덧글에 대한 답을 하겠습니다. “무속은 미신이라고 천시를 하고 사회과학은 약간의 권위를, 자연과학은 최고의 권위”를 지니는 방식은 해당 영역이 사회 내에서 지니는 위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사회적으로 특정한 준거가 상대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며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준거가 있기 때문이란 것은 이미 인정하셨으니 공유하는 전제로 삼겠습니다.) 말씀하신 예측력 및 도구적 유용성이 나름의 영향력 있는 기준의 요소로서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준거가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것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사회 내 영역 간 위상도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 지점에서 관점의 차이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중세 서구 사회에서는 종교가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단일한 준거로사 사회 전반을 지배했습니다. 이런 경향이 약화되기 시작한 후였지만, 여전히 강력한 당시 해당 사회의 준거에 따라 현재의 ‘과학적’ 천문체계의 기반을 마련한 코페르니쿠스는 그른 이론을 지닌 사람으로서 처형되어야 한다고까지 주장―마르크스주의자들을 보는 teferi 님의 관점과 흡사하군요―되었었지요. 하지만 더 이상 종교가 특정 사회의 단일한 준거를 제공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시대와 공간에 따라, 사회 내 가치 지평과 규범적 토대에 따라 준거는 변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특정 사회 내에서도 지배적인 준거 이외의 다른 준거를 지닌 집단도 분명 존재합니다. 이는 teferi 님의 논거를 가져와도 여전히 적용됩니다. 말씀하신 “자신의 문제의 원인을 알고 해결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사람의 욕구”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원인을 규명하는 방식과 기준은 하나가 아닙니다. 이러한 욕구를 해소하는 방식은 영역별로 차이가 있습니다. 최소한의 내적 체계가 있다면 이러한 욕구는 충족됩니다. 무속 신앙도 인간의 이러한 욕구―가 있다면―를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점집에 가서 내가 가진 문제를 털어 놓으면, 점쟁이는 나름대로 답을 주니까요. 원인은 물론 해결방안도 줍니다. 종교 체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는 거대한 믿음의 토대와 내적 체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세기에 걸쳐 발전한 신학이나 변신론 체계는 정말 탄탄합니다. 물론, 종교적인 체계가 끝내 검증될 수 없는 것은 최종적인 토대로서의 신이 검증 불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인지 능력 밖의 존재인 신을 상정하는 순간, 더 이상의 검증은 불가능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스스로 자연과학과 같은 ‘과학’임을 주장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는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철학, 역사학, 문학도 어느 정도까지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자신의 문제의 원인을 알고 해결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사람의 욕구”를 충족시켜줍니다. 이는 근대 합리성이 지배 담론으로서 존재하는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자연과학적 의미의 “예측력과 실용성”을 제공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문제의 원인을 알고 해결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사람의 욕구”는 충분히 충족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종교가 여전히 강력한 토대로서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것이 이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개인의 문제와 원인, 해결방안과 심지어 대처방안까지 그 모두를 규정하는 비합리적 토대는 자연과학적 방식 하나가 아닌 것입니다. 자, 여기 또 하나의 반례를 제시했습니다. (‘반증’으로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사회과학에 “자연과학의 엄격한 검증”을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엄격함”을 규정하는 검증 자체의 기준이 자연과학 영역의 조건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말입니다. “자연과학적 검증”은 신이 제시한 절대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본질적이고 절대적인, ‘이데아’로서의 기준이 아니라 인간이 구축한 것인 한 특정한 준거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그 준거를 구성하는 영역의 조건과 집단의 실천 양식들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여타의 영역에서는 해당 영역의 ‘다른’ 조건을 고려할 때 동일한 준거가 무조건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무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차용하는 데 유리한 영역이 있고 불리한 영역도 있을 것입니다. 즉, 정도의 차이는 있을 것입니다. 이는 인정합니다. 하지만 최소한 특정 영역에서 생성된 단일한 기준이 여타 영역을 모두 압도하며 지배할 만한 준거임을 주장하기는 어렵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것이 선/악, 옳음/그름의 기준일 수도 없다는 말이고요. 다시 말하지만, 저는 자연과학 영역이 지닌 예측력과 실용성을 십분 인정합니다. 다만, 그것이 모든 영역에 대한 단일한 준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덧, 제가 철회하시는 게 좋겠다고 했던 두 가지는 철회 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반대 논거를 다시 펴실 예정이신지요. 1-1.예측력과 실용성을 진정으로 지향하지 않는 학문은 무가치합니다. 그러나 고전적인 인문학인 문학, 역사학, 철학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닙니다. 문학에서도 좋은 문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가 있습니다. 즉 어떻게 글을 써야 좋은 문학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예측을 하며, 이러한 예측이 곧 실용성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왜 인문학에서도 예측이 발생하느냐 하면, 이론을 이해하는것은 곧 예측이기 때문입니다. 이론을 이해했다는 것은 곧 응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론을 만든 사람이 관찰한 상황과 결과만 이용한다면 그건 이론을 이해하였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이론의 응용이며, 이는 예측과 동일한 활동입니다. 역사학의 경우 역사이론을 만들어 어떤 역사단계에 어떤 이유때문에 어떤 사건이 발생한다고 이론을 만들 경우에는 이 이론으로 미래를 예측하지는 못하더라도 현재 남아있는 석기시대 부족사회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며, 이것도 일종의 예측활동입니다. 또한 역사이론 없이 그저 특정 시기에 일어난 특정 사건의 강조와 기술에만 힘쓴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활동으로 인해 역사적 자료에 근거한 이론을 구성하는데 일조하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론을 만드는 것을 거부하고 사실을 조사하는 것도 거부하며 사변에만 열중하는 행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1-1-1.특정한 학문을 학습하기로 결정한 것과 그 학문이 진정으로 개인에게 이익이 되는지는 서로 별개입니다. 개개인의 비합리성, 인식의 오류로 인해 개개인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개개인의 선택이 기준이 아니라, 그 이론의 예측력이 같은 대상을 목표로 하는 다른 이론과 비교하여 얼마나 뛰어난지가 올바름의 기준이 되는 것이며, 그러한 올바름은 결국 선택의 이익으로 뒷받침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현상을 10%밖에 예측하지 못하는 이론과 동일한 현상을 50% 예측하는 이론이 있으면 전자와 후자가 대등한 것이 아니라 후자가 옳고 전자는 그르다는 겁니다. 예측 모델 구축은 보편적인 의미의 성과입니다. 어떤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도 결국에는 비슷한 상황에서 적용할 수 있는 이론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함부러 대등하다를 남발하게 되면 프리메이슨이론과 같은 황당한 음모론에도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프리메이슨이론도 특정 상황에서는 성립할 수 있습니다. 단지 다른 상황에 적용할 때는 임시 방편 가설의 도움을 받을 뿐이죠. 1-1. (계속) 자연과학적 방법론이 분과학문의 특성과 자연과학적 방법론 구축으로 배제하는 요소를 무시하고 성과라고 치장하는 것이 성찰적이지 못하다는 말은 무엇이 옳은지도 그른지도 모르는 상황을 계속 유지해야한다는 것과 동의어입니다. 아르님은 사회과학이 인간을 연구하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판단이 연구자가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없다고 하셨으나, 그 근거로 든 인간의 자유의지는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개념이며 자기 행동에 대한 이유도 인간의 편견으로 인해 진정한 이유를 말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화론에서는 모든 생명체는 유전자를 보전하는 행동을 한다고 예측합니다. 왜냐하면 유전자를 보전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생명체는 유전자를 보전하는 행동을 하는 생명체에 밀려 계속적으로 유전자가 남아 후손으로 이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도 이에 예외가 될 수 없음이 계속 밝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를 보전하려는 행동을 쉽게 하게 하는 유전자를 지니고 태어나서 행동에 일정한 경향성을 띄게 됩니다. 20세기에는 페미니스트가 아무리 여자는 만들어진다고 역설을 하였어도, 21세기에 속속 여자는 태어나는 것임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몇몇 페미니스트가 아무리 부정하더라도 여자는 태어날때부터 남자와 성격도 행동전략도 다릅니다. 이는 개개인이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와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심리학 실험에서 인간은 자신의 의도에 따라서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요인에 따라 행동하며 행동이후 자신의 의도를 행동을 정당화하기위해 변화시킨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러한 연구에서 밝혀진 것은 사람은 종종 스스로를 속인다는 것입니다. 또한 경험적으로도 현실에서 관찰한 것으로도 사람은 의도한 대로 행동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불확실한 사람의 자유의지, 행위의 설명력을 기준으로 사람을 설명하는 것이 온당하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연구 할 때 오히려 편향성이 증가할 수 있으며,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각자의 편향성을 겹쳐서 없애고 행동의 진정한 원인을 찾을 수 있으며, 이 이유에서 연구자의 절대적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1-2. 자연과학적 방법론이 단일한 준거로서 작용해야만 하는 이유는 사회과학의 연구에서도 그 방법론이 현상과 요인의 관계를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사람이 스스로의 행동을 잘 설명할 수 없으며, 오히려 사람의 집단의 행동을 관찰하여 각 개인의 행동요인을 설명하는 것이 더 예측력이 있는 이론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2. 이해의 정수는 응용에 있지 암기에 있지 않습니다. 체계적으로 설명한다고 해도 그 설명은 자신의 언어가 되어야지 남의 언어를 그대로 따라쓰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저 암기해서 되뇌이는지 이해했는지를 구분하는 척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어를 바꿔 설명하는 것도 하나의 응용이며, 예측입니다. 이 표현에서 성립된 의미가 다른 표현으로 바꾸더라도 똑같이 성립할 것이라는 예측이라는 것입니다. 중세 유럽에서 종교가 강력한 척도였는데 바뀌었다, 과학도 그리될 것이라는 것은 과도한 단순화입니다. 종교는 문제해결의 측면에서 보면 아무것도 해결한 것이 없습니다.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문제의 해결이지만 종교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기적을 보여준 적이 없습니다. 단지 욕망을 억제했을 뿐이죠. 과학시대에 와서야 사람들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무속이 욕망을 충족한다고 하지만, 이는 사람의 오인식일 뿐입니다. 굿을 한다고 해 보았자 상담효과, 위약효과만 있을 뿐이며 이는 굳이 굿을 하지 않더라도 훨씬 더 저렴한 비용으로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돈을 무속인에게 바쳐서 욕망을 충족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거짓 원인에 대한 거짓 처방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습니다. 오직 올바른 원인을 찾아낸 올바른 처방만이 진정으로 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근대 사회과학의 엄청난 영향력을 돌아볼 때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식으로 전부다 대등한 권리를 주장한다면 그 중에서 가장 그릇된 사상이 채택될 위험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사상을 배제하기 위한 가장 큰 잣대는 예측력입니다. 공산주의가 맑스가 예측한 대로였다면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측력을 담보하기 위한 조건은 현재까지 밝혀진 것 중에서 과학적인 검증을 통과한다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기에 이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ps.역사이론에 관한 주장은 철회하지만 상대적 의미의 옳음은 철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절대적 의미의 옳음은 도달할 수 없기에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하는 아무런 기준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장 옳은 것을 찾고 나머지를 배제해야 합니다. 개념에 대한 불일치부터 바로잡아야 하겠습니다. 일단: 1-1. 예측’의 범주를 확장 시키며까지 자기 논거를 지키려는 노력이 눈물겹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이면 좀 곤란합니다. 문학 영역의 가치가 “어떻게 글을 써야 좋은 문학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는”를 “예측”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실용성이 발생(좋은 글을 쓰는 것 말씀이시겠지요?) 한다고요? 이런 식으로 예측과 실용의 범주를 넓히신다면 모든 학문 영역이 포함됩니다. 각각의 학문 영역은 물론, 더 세부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이론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영역은 무엇이 좋은 이론이며 무엇이 좋은 연구 성과인지 그리고 무엇이 좋은 방식의 기술인지에 대한 나름의 준거를 확립해 나갑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 이론 영역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서 적절하고 ‘좋은’지에 대하여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 사이에 나름의 기준이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 이론 역시 ‘어떻게 분석하고 기술해야 좋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인지 평가받을 수 있는’ 예측을 가능케 하며 이에 따라 좋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기술할 수 있는 ‘실용성’이 발생합니다. 자연과학 연구 역시 마찬가지로 설명 가능하겠습니다. ‘어떻게 연구를 진행하고 기술해야 좋은 자연과학 연구 성과라고 평가받을 수 있는’지 예측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좋은 자연과학 연구 성과를 내는 실용성이 발생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역사학이나 철학도 마찬가지지요. 동일한 논리로 예측과 실용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모든 영역은 나름의 평가 기준을 구축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지금껏 말하는 예측력과 실용성과 같은 층위입니까? 말씀하신 자연과학의 예측력과 실용성에 이런 것이었습니까?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애초에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비판할 여지조차 사라집니다. 역사학에 대한 부분은 더 이상합니다. 미래에 대해 말하지 못하는 게 어떻게 ‘예측’ 입니까? 어떻게 현재 시점에 대해서만 설명하는 것을 ‘예측’이라고 규정할 수 있단 말입니까? 철학에 대한 부분은 아예 답도 없으셨고요. 아무래도 철학의 경우는 “이론을 만드는 것을 거부하고 사실을 조사하는 것도 거부하며 사변에만 열중하는 행태”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철학도 문학과 같은 식의 기준을 적용하면 예측과 실용이 “발생”합니다. “이론을 이해했다는 것은 곧 응용할 수 있다는 것”이란 말은 응용을 적용(application)의 의미로 본다면 충분히 동의할 만합니다. 하지만 응용-적용이 ‘예측’이라는 식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예측이라는 어휘의 자의적인 규정일 뿐입니다. 적용은 필연적으로 미래에 대한 행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래 시점까지 보편적으로 적용하여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예측’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적용한다고 그것이 모두 ‘예측’은 아니지 않습니까. ‘진리’에 대한 부분도 그렀지만, 자꾸 자기 의도에 맞게 개념을 재규정하시면 논의 자체가 불가능 합니다. ‘예측’의 경우는 심지어 논의 중간에 바뀌고 있군요. 이 점에 대해서 우선 바로 잡아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이하의 부분은 이 부분을 바로잡은 뒤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예측“에 대한 자의적인 개념 규정 외에도, 맥락의 혼용까지 보입니다. 아래 2.에서는 “예측”에 대해 서로 다른 맥락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해에 대해 “이 표현에서 성립된 의미가 다른 표현으로 바꾸더라도 똑같이 성립할 것이라는 예측”이라고 하신 부분입니다. (1) “어떤 대상을 이해했다고 주장하려면 예측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정 시기의 특정 사건에 대한 이해 이론이라면 무한대의 이론이 가능합니다. 이 수많은 이론중에 어떤 이론이 다른 이론보다 더 옳다고 주장하려면 이론이 주장한 바에 따라 예측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예측을 할 수 있는 이론과 할 수 없는 이론이 대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면 이 세상에 가치없는 이론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스파게티 괴물 신의 기적이라는 이론도 맑시즘과 대등합니다.” 2009/11/25 13:43 라고 하신 부분의 “예측”과 (2) “이해의 정수는 응용에 있지 암기에 있지 않습니다. 체계적으로 설명한다고 해도 그 설명은 자신의 언어가 되어야지 남의 언어를 그대로 따라쓰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저 암기해서 되뇌이는지 이해했는지를 구분하는 척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어를 바꿔 설명하는 것도 하나의 응용이며, 예측입니다. 이 표현에서 성립된 의미가 다른 표현으로 바꾸더라도 똑같이 성립할 것이라는 예측이라는 것입니다.” 2009/11/30 01:24 라고 하신 부분의 “예측”이 같은 맥락입니까? 저는 (1)에 대한 반론을 제기했는데, 왜 (2)같은 답이 돌아오는 것입니까? (2)에서 말씀하신 것이라면 자연과학 영역에서도, 사회과학 영역에서도, 고전적인 인문학 영역에서도, 마르크스주의 이론 영역에서도, “심지어 스파게티 괴물 신의 기적이라는 이론”에서도 모두 적용 가능합니다. 나름의 체계를 지니고 있다면 어느 영역이든 가능합니다. “이 표현에서 성립된 의미가 다른 표현으로 바꾸더라도 똑같이 성립할 것이라는 예측” 정도는 말이지요. 이는 해당 이론이 지닌 의미세계가 과학적방법론을 통해 관찰결과와의 정합성을 굳이 검증하지 않아도 가능한 지점 아닙니까? 자연과학 영역의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해 제시하신 ‘학문의 가치를 따지는 기준’으로서의 “예측”이 이런 층위였다면 제가 굳이 학문 영역에서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다른 기준의 일례로서 “이해”를 제시했겠습니까? 지금껏 제시하신 “예측”이 저런 뜻이었다면 애초에 자연과학 영역의 우월성을 주장할 만한 논거가 아니지 않습니까? 중고등학교 교과목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세상에 ‘암기’만 하고 ‘이해’ 했다고 주장 수 있는 학문 영역에 대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맥락의 혼용 때문에 2.에 대한 답은 이전보다 더 생뚱맞은 말이 되었을 뿐입니다. 이 역시 바로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규정과 맥락 혼용 모두 “예측”에 대한 부분이라 일단 적습니다. 바로잡으신 후에 나머지 부분에 대해 추가로 답을 하겠습니다. 예측이라 함은 조건이 바뀌었을 때도 그 이론이 규정하는 바에 따라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개념이 응용과도 연결되는 것입니다. 조건이 미세하게 변한다고 할지라도 조건의 변화는 일어난 것이고 그에 따른 결과는 이론에 따를 것이라고 보는 것은 예측행위입니다. 그리고 이런 예측이 정말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검증하는 기준은 과학적 연구방법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론이 옳은지를 보기 위해서 현실이 이론에 부합하는지를 관찰해야 하고 현실중에 이론이 다루지 않는 다른 변수를 제거해야 하는데, 이러한 활동이 곧 과학적 연구방법론이기 때문입니다. 각자 나름의 평가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연구방법론에 의한 검증이라는 하나의 평가기준을 모든 학문이 만족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문학이론이라고 하면, 좋은 문학이 되어야 하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조건이 정말 옳은가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좋은 문학이라고 평가받는 문학이 정말 그런 조건이 만족하는지를 조사하고, 좋은 문학이라고 평가받지 못한 문학에 조건을 만족하는 것이 있는지를 조사하고, 평가받기 전의 문학을 조사하여 특정 조건을 만족하는 문학이 사후적으로 좋은 문학이라고 평가받는지를 조사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이 과학적 연구방법론에 의한 검증이고 이런 검증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진정으로 문학이론이 문학을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재표현이 곧 예측을 동반한다는 것이 예측의 범위를 지나치게 넓게 잡았다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예측없이도 재표현이 가능한 많은 주장이 있으며 재표현만으로 예측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재표현에 대한 제 주장은 철회합니다. 그러나 무언가를 이해했다고 말하려면 그 이해는 예측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철회하지 않겠습니다. 어떤 이해가 올바른 이해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예측력외에 다른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단, 예측 개념에 대하여: 다시 말하지만, 예측 활동은 응용-적용에 포함됩니다. 하지만 예측 활동만이 응용-적용은 아닙니다. 조건의 변화해도 여전히 적용된다는 것은 맞지만, 이 조건 중 시간의 변화한 상황으로서 미래 시점에 대한 설명이라는 점이 ‘예측’ 개념의 기본입니다. 대체 누가 미래 시점을 배제한 채 ‘예측’했다고 말을 합니까? 현재를 예측했다는 식의 말도 결국 예측의 시점은 과거로서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측은 미래 시점에 대한 현재적 언술입니다. 제발, 사전이라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납득 가능한 반대 용례를 제시하십시오. 이런 기본적인 개념에서부터 이런 식으로 왈가왈부해야 하는 건 참 피곤합니다. 구체적인 조건들의 변화 하에서도 여전히 적용 가능한 것은 이론이 보편성을 판단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가 맞습니다. 하지만 예측은 미래에 대한 언급입니다. 예측을 적용에 포함시킬 수는 있어도 응용-적용을 예측만으로 환원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입니다. 고로, 역사이론에 대한 논거는 일단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개념부터 틀렸으니 이하 논거는 논박할 가치가 없어집니다. 예측이 미래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반례를 들어 다시 논의를 진행시키시든지, 아니면 “예측” 개념을 자신의 논거에 필요한 방식으로 임의 규정했음을 인정하십시오. 문학 이론에 대한 언급을 보니 이론 자체에 대해서도 매우 편협한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이론은 대상/현상에 대한 체계적인 언술입니다. 내적 체계를 통해 구축된 실재를 말합니다. 대체적으로 법칙 등과 같은 일련의 보편적 언술을 포함하며, 이 때문에 예측이 가능한 지점이 생기기도 합니다. 문학 이론을 좋은 문학의 조건을 기술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이론, 더 좁게는 문학 이론에 대해서도 (또다시) 편협한 자의적 규정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학 이론에 관한 개론서 한 권 아무거나 잡아 읽어 보십시오. 문학이 구성하는 다양한 실재들을 설명하는 체계적인 일련의 언술들에 대한 것과, 단순히 좋은 문학의 조건을 기술하는 것 중 어느 쪽에 가까운 것을 문학 이론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아니면, 문학 이론에 관해 실제 연구를 진행하는 해당 학자 집단보다 자신이 더 문학 이론에 대해 설명하고 규정할 지적/인식론적 우월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실 셈입니까? 자연과학 영역에서 무엇이 ‘더 좋은’ 사물인가를 기술하기 위한 것이 이론이고 과학적 방법론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문학 영역에서는 ‘더 좋은’ 문학 작품인가를 설명하는 것이 이론이고 과학적 방법론입니까. 왜 또 맥락을 혼용하십니까. “이론이 옳은지를 보기 위해서 현실이 이론에 부합하는지를 관찰해야 하고 현실중에 이론이 다루지 않는 다른 변수를 제거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문학 텍스트가 자연과학 영역이 검증의 준거로 삼는 현실인 ‘물리적인 실재’입니까? 게다가, 이 편협한 문학 이론의 검증 과정에 대해서 “그러면 그런 조건이 정말 옳은가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좋은 문학이라고 평가받는 문학이 정말 그런 조건이 만족하는지를 조사하고, 좋은 문학이라고 평가받지 못한 문학에 조건을 만족하는 것이 있는지를 조사하고, 평가받기 전의 문학을 조사하여 특정 조건을 만족하는 문학이 사후적으로 좋은 문학이라고 평가받는지를 조사해야 합니다”라고 주장 하셨는데, 애초에 ‘평가’ 라는 공동체의 인정에 기반을 둔 증언들을 준거로 삼는다면 대체 어떻게 객관성을 담보한다고 전제된 성향으로서 ‘과학적’일 수 있겠습니까? 평가라는 것은 공동체에 기인하며, 이는 공동체의 환경과 시공간적 맥락, 사회문화적 조건 등에 따라 유동적입니다. 때문에 ‘좋은 문학이라는 평가’가 과거 현재 미래 다르게 이루어지며, 이는 심지어 문화권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성향을 보입니다. 이는 관찰의 이론 의존성을 넘어서는 수준의 탈 객관적 기반 아닙니까? 이런 기반에 의존하는 것이 어떻게 유효한 자연과학적 방법론입니까. 과학적 방법론은 적용 가능한 조건을 배제한 채 무조건 적용하기만 하면 언제나 진리를 생산해내는 신의 선물이 아닙니다. 인간이 개발해 낸 방법론입니다. 애초에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 가능케 하는 기본 조건으로서의 물리적인 기반이 없는 문학 영역에 대해 무조건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 하겠다 주장하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입니다. 유효한 조건들을 지닌 영역의 경우에조차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미 ‘그래야만 옳고 그름이 있으니까’ 같은 식의 당위적인 주장에 귀착한 시점에서, 심지어 조건이 다른 경우까지도 무조건적으로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합리적인 근거가 있습니까? 자연과학 영역이 큰 관심을 가지는 것이 ‘예측’으로서 물리화학적 ‘현상’의 전후 상황을 인과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라면, 인문학 영역에서는 동일한 목표를 지닐 수 없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문학 영역에 대해서 teferi 님도 저렇게 자연과학 영역과 다른 목표를 설정하실 수밖에 없지 않으셨습니까. 서로 다르지 않습니까. 제가 계속 영역별 조건의 차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과 똑같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해야만 하는 이유로 ‘그것 밖에 옳고 그름의 기준이 없다’ 고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는데, 저는 다른 기준들이 있을 수 있음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과학주의의 신앙만큼이나 다른 종교적 신앙들도 나름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굳이 종교를 말하지 않더라도, 현상적인 측면에서 각각의 실천의 영역에서 자연과학과 다른 방식으로 영역 내 탁월성을 인정하는 평가의 과정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철학 영역에서 그 탁월성을 인정받는 여러 가지 사조들이 근대 자연과학 영역의 준거에 따라 평가를 받았기 때문은 아니지 않습니까. [[ 여기서 이어질, “왜 ‘예측력과 실용성’만이 옳고 그름의 기준인지”에 대한 질문이 1-1-1. 에 있는데, 아직 그 이전의 “예측”에 대한 개념 정립이 안 돼 거기까지 나가지도 못하고 있군요. 1-1-1. 부분만 잠시 곁들여 언급하겠습니다. 제 질문은 “왜 ‘예측력과 실용성’만이 옳고 그름의 기준인지”였지요. 이에 대한 답은 “이론의 예측력이 같은 대상을 목표로 하는 다른 이론과 비교하여 얼마나 뛰어난지가 올바름의 기준이 되는 것이며, 그러한 올바름은 결국 선택의 이익으로 뒷받침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측력에 있어 비교우위가 곧 올바름이며 (비교우위가 올바름이라는 말도 참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럼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틀린 게 아니라 상대적으로 덜 올바른―말이 안되는 표현이지만―것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마르크스주의 이론도 굳이 따지자면 “예측력”이 0%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계급 갈등, 재생산, 투쟁의 공간으로서의 사회에 대한 이론적 기술은 현재 맞아떨어지는 현상들이 꽤 많으니까요. 특목고-일반고-실업고 학생 부모 재산 및 소득수준에 대한 통계자료라든가. 그렇다면 대체 어느 지점부터 올바른 것이 그른 것으로 변하게 됩니까? 상대적인 비교우위에 따른다면 개념적인 차원에서는 애초에 이런 기준의 규정 자체가 불가능한 것 아닙니까?), 그것이 올바른 이유를 예측력이 높은 이론을 선택한 개인에게 이익이 된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만약 개개인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각자 개인이 선택하지 못한다면, 대체 누가 말씀하신 “진정으로 개인에게 이익”인 것을 판별합니까? (이는 개개인에게 ‘진정한 이익’인 계급의식을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적 허위의식 때문에 제대로 인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마르크스의 주장과 하등 다를 바 없군요. ‘진정한 이익’을 어떤 기준에 따라 판별할 수 있느냐에 대한 마르크스의 답은, 마르크스 그 자신의 이론이었지요. 이러한 권위적인 준거를 비판하시는 teferi 님은 그 기준이 무엇이라고 하시렵니까? 이건 준거 자체에 대한 부분이기에 이미 “과학적 방법론”에 의해 검증할 수 없는, 가치의 영역 아닙니까?) 대체 누가 개인의 ‘진정한 이익’을 판별할 인식론적 특권을 지니고 있기에 그것이 “예측력”에 기인한다고 말하고 있단 말입니까. 더 근본적으론, 대체 어떻게 개개인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특정한 개인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다른 특정한 개인에게는 손해가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결국 개개인에게 이익이 되는 이론이 ‘옳은’ 것은 보편적인 의미가 아니라 ‘해당 개인에게 옳은’ 것일 뿐 아닙니까? 아니면 마르크스처럼 모든 인간을 아우르는 ‘진정한 이익’인 ‘계급적 이익’이란 것이 존재한다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까? 심지어 이 ‘계급적 이익’도 서로 계급이 다른 개인들 간에는 상충합니다.]] 말씀하신 ‘좋은 문학이라는 평가’는 해당 집단에 의존합니다. 저는 이러한 평가의 기준이 되는 것으로서 각각의 집단에서 각각의 준거가 있다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면 이 준거 역시 또 과학적 방법론에 의해 구축된다 하실 생각이십니까? 문학 영역의 과학적 방법론의 기반이 되는 집단의 ‘평가’의 기준을 구축하기 위해 다시 또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해야 한다면, 그 기반은 또다시 집단의 ‘평가’ 밖에 없을 테니, 그러면 또 그 준거를 평가하기 위한 방법론의 준거를 평가하기 위한 방법론의 준거를 평가하기 위해 또다시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해야 하고, 그러면 또 … 하는 식의 무한 퇴행에 빠질 따름입니다.) teferi 님 스스로가 좋은 문학의 기준이 집단에 의존하는 ‘평가’ 밖에 없음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셨습니까? 굳이 ‘관찰’에 의거한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하고 싶으셨겠지만, 정작 그 ‘관찰’의 대상이 집단의 평가 결과일 뿐 아닙니까. 집단 내부적인 기준(이는 고정되고 기술된 규칙이라기보다는 한정주의적인 의미에서 설명 가능한 실천적 감각을 말합니다)에 따른 평가에 대한 관찰-연구를 통해 그러한 집단의 평가에서 벗어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결과를 도출하려는 것이 유효한 시도이기나 합니까? 그리고 실제로 그런 방식의 ‘검증’을 문학 영역에서 주요한 방식으로 행하고 있기나 합니까? 이 역시 주장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방식의 문학 연구에 대해서는 문학 영역의 논문들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드려도 충분한 실례가 됩니다. 각자 나름의 평가기준 부분에 대하여: 영역 내 구축되는 평가 기준은 옳고/그름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탁월성에 대한 것에 가깝습니다. 문학 영역을 얘기하고 있으니 계속 문학에 대해 말을 해보지요. 가령, '옳은' 문학 이론이란 무엇입니까? 철학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체 '옳은'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철학 부분은 계속 답을 피하시는데, 답을 해 주시지요.) 영역 내 무엇이 적절하고 탁월한가는 영역 내 실천자들의 상호 평가 및 인정의 과정 속에서 도출됩니다. 자연과학자 집단의 경우는 말씀하신 과학적 방법론의 적용이나 재현가능성 등이 주요한 평가 기준으로 작용합니다. 영역이 지향하는 연구 대상의 속성에 맞는 적절하고 탁월한 방식이라는 합의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다른 영역은 다른 방식으로 적절성과 탁월성을 평가합니다. 이 때 평가의 방식은 (이미 여러 번 말한 바 있지만) 명시 가능한 규칙의 형태라기보다는 한정주의적 방식의 실천 감각입니다. 특정한 방식으로 구체화 된 기준을 제시할 수는 있을지언정, 제시된 것만이 기준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은 실제 평가가 일어나는 영역을 관찰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실천 감각을 통한 평가와 상호 인정은 자연과학 영역도 결코 예외는 아닙니다. 과학적 방법론과 재현가능성 외에도 다른 실천적 지식들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실천 감각은 영역 내 참여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며, 이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장 내 참여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해-예측의 문제는 "예측" 개념규정부터 바로잡은 후에 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teferi at 2009/11/30 01:24 에 대해서 아직 절반도 답하지 못했습니다. 개념에 대한 부분이 빨리 해소되고 되돌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답변이 늦었네요.
응용-적용활동은 이론에 따른 미래시점의 결과를 내기 위하여 현재시점의 활동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측이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재표현이라는 활동도 미래시점에서 동등한 이해라는 결과를 내기 위해서 표현을 다르게 하는 현재의 활동을 합니다. 이 때 자신의 표현이 기존의 표현과 다름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이해가 동일함을 예측하게 되며, 이런 예측이 없다면, 예측이 성공적이지 못하다면 재표현활동은 할 수 없게 됩니다. 미래에 동일한 이해를 보장하지 못하는 표현은 다른 것에 대한 표현일 뿐이지 동일한 것에 대한 재표현이라고 할 수 없으니까요. 예측성과 실용성을 만족하는 것만이 성과라는 주장은 예측성과 실용성이 만족되지 않은 성과가 있다는 반례에 무너지기에 아르님은 인문학을 예로 들었습니다. 문학 이론이 좋은 문학의 규정만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문학 이론 중에 좋은 문학의 규정이 있다고 하여 문학 전체가 예측성을 기반한 가치있는 학문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논지전개는 부적절한 것임을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예측성과 실용성이 없는 학문은 가치가 없는가 하는 질문으로 되돌아갑니다. 이 질문에서 저는 그렇다고 답하겠습니다. 예측성이 없는 학문이라면, 이론이 없어서 그저 사실을 기술하거나, 이론이 있되 증명도 반증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수학이나 논리학처럼 현실을 다루지 않고 명제간의 논리적 상관관계만을 따지는 학문은 제외합니다.) 왜냐하면 이론의 증명을 하려면 미래시점에서 실험 또는 관찰한 결과가 이론에 부합하는 결과를 지속적으로 내야 하고 이론의 반증을 하려면 미래시점에서 실험 또는 관찰한 결과가 이론에 부합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현재시점에서만 성립하고 미래시점의 예측을 할 수 없다면 이론이 만들어진 시기의 시점은 이론이 만들어진 이후 즉시 과거가 되기 때문에 이론성립시기로부터 미래시점의 관찰결과에 따라 이론이 정부합을 논할 수 없으며 따라서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합니다. 만일 단순히 사실의 정확한 기술만 목적으로 한다면 차후에 그 정확한 기술을 이용하여 예측성이 있는 이론을 만들 수 있으므로 예측성만이 가치가 있든 없든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습니다. 따라서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한 이론이 가치가 있다는 말은 예측성이 없어도 가치가 있는 이론이 가치가 있다는 말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한 이론은 가치가 있을까요? 가치가 없거나, 있어도 매우 미미합니다. 왜냐하면 그 이론을 만드는 수고에 비하여 얻을 것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한 이론은 수없이 많이 존재할 수 있으며 모두 동등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따라서 어떤 현상에 대한 개인의 의견 표출이며 이 의견이 많이 지지받는다고 하여 옳거나 좋거나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고 적게 지지받는다고 하여 그르다고 나쁘다고 바람직하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영역내 실천자의 상호평가도 인정도 결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반증할 수 없다면 아무리 적게 지지받으며 배척받는 이론이라도 다른 이론과 똑같이 존재함으로서 가치를 지닙니다. 그 이론이 존재해서는 안 될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한 이론은 많은 생각과 고민 속에서 나온 이론이든 단 5초간 생각해서 나온 이론과 그 가치가 모두 동등합니다. 문학이론이든 철학이론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이든 존재는 개똥이다라는 나의 말이든 가치는 모두 동등합니다. 모두 반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응용-적용은 현재 시점에서의 실천입니다. “미래시점의 결과를 내기 위하여” 라는 것은 teferi 님께서 부가적으로 덧붙인 것일 뿐이고요. 예측이 미래 시점에 대한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논의를 유지하기 위해 기존의 논지를 바꿔 '미래'를 끌고 억지로 들어온 것 정도 이상의 의미는 없어 보입니다. 특정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의 현재적 적용은 '현재' 시점에서 체계적인 설명을 행한 점에서 응용-적용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이 '미래'에도 유지 되는가 등의 유효성 검증은 추가적인 일이며, 실제로 '미래'에 유지되는가와 같은 '동일성'의 준거가 일치되기 어렵거나 시간의 축에서 다른 조건의 추가로 '동일성'을 보장할 수 없는 영역(자연 현상보다는 인간의 의미세계에 대한 부분이 이런 요소의 개입이 더 심한 편입니다)에서는 '미래'에 대한 동일성 검증이 가능한가에 대한 더 깊은 층위의 논의까지 개입해야 합니다. 또한, “미래에 동일한 이해”라는 식의 표현 역시 동일성에 준거와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주장이기에 큰 설득력이 없는 논의의 기반입니다. 여기는 '이해'가 지니는 맥락의존성 및 주관성에 대한 논의가 추가적으로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합니다. 고로,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예측이 미래 시점을 포함한다는 제 개념 규정을 받아들였다는 의미로만 수용하겠습니다. 즉, 예측 개념을 자신의 논거에 필요한 방식으로 임의 규정했음을 인정했음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 이런 식으로 지금껏 주장하신 여러 가지 예시들이 논거로서 부적합함을 계속 반박당해 계속 철회하고 있으며, 개념들 또한 자신의 주장에 합치하는 방식의 의도적인 자의성을 부여했다가 반박당해 철회하고 있음을 일단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 그래서 ‘다시’ “예측성과 실용성”으로 돌아갑니다. 여전히 이 부분은 고수하기 위해 또다시 다른 ad hoc 명제를 추가하십니다. 일단 이 ad hoc 명제 역시 별로 유의미하지 못함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미래 시점에 대한 기술인 “예측”은 쉽게 말해 ‘미래에 이러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자연과학 영역의 ‘법칙’은 전시간적 보편성을 주장함으로써‘ 과거에 이러했고, 현재도 이러하니, 미래도 이러할 것이다’는 식의 “예측”을 가능케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전시간적 보편성에 입각해 실험/관찰 결과를 통한 이론의 증명 및 반증 활동이 가능합니다. 반면, 자연과학 영역과는 달리 인간의 의미세계 및 사회현상을 연구하는 다른 학문들에서는 (물론 분과별로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많은 경우 전시간적 보편성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주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연과학에서 전시간적 보편성을 주장하기 위해 수많은 조건들을 ‘통제’라는 미명하에 배제하며, 이는 영역 및 연구 대상의 특성상 어느 정도 허용되더라도 나름의 예측 모델 형성에 지장이 없음이 자연과학의 역사를 통해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여타의 영역의 경우 그 대상의 차이로 인해 이러한 ‘배제’가 오히려 대상에 대한 연구에 치명적인 왜곡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연구자가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하기 위해 임의로 ‘통제’ 혹은 ‘배제’하는 요소들이 인간의 의미세계를 구축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사실상 배제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60년대 이후 이미 일군의 사조까지도 이루고 있습니다. Symbolic Interactionism이나 Ethnomethodology 등을 기반으로 하는 학적 성찰들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는 제가 줄기차게 주장해 온 분과별, 영역별 ‘차이’에 따른 것입니다. 보편성에 입각한 예측가능성의 주장이 반증의 준거라는 말은 맞습니다. 이론 형성 이후의 실험은 이론 형성의 시점에서 미래라는 점에서, 특정 이론이 미래의 결과까지 내포한다고 주장해야만 그것과의 합치/불합치 여부가 실험-관찰을 통해 증명/반증될 수 있다는 점도 맞습니다. 자연과학 영역이 기반을 두고 있는 준거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여전히 그러한 기준이 전 영역에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합리적인 설명은 되지 않습니다. “예측성이 없는 학문이라면, 이론이 없어서 그저 사실을 기술하거나, 이론이 있되 증명도 반증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수학이나 논리학처럼 현실을 다루지 않고 명제간의 논리적 상관관계만을 따지는 학문은 제외합니다.)“ “만일 단순히 사실의 정확한 기술만 목적으로 한다면 차후에 그 정확한 기술을 이용하여 예측성이 있는 이론을 만들 수 있으므로 예측성만이 가치가 있든 없든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습니다.” 2009/12/07 17:13 하는 식의 말들은 제가 말한 인문학 영역, 특히 계속 답을 피하시는 철학은 일단 무가치한 것이라 말씀하신 셈이며, 그 이외에도 도구적 실용성을 지향하지 않는 수많은 영역들 역시 무가치한 것이라 주장하신 것입니다. 또한, 수학이나 논리학 등도 배제하실 것 없습니다.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시며 무가치한 것이라 주장하시면 됩니다. 위의 문장들은 자연과학 영역에서와 같이 전시간적 이론 구축을 도모할 때 해당 영역의 성과가 ‘이용’당하면 가치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무가치한 것이라는 말과 다를 바 없습니다. 즉, 해당 영역의 지향이 어떠한가를 넘어, 해당 영역의 성과가 어떤 영역에서든 “예측성과 실용성”을 구축하는 데 일조한다면 가치를 부여한다는 사후적인 가치 규정입니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 이론 구축 과정에서 종종 모차르트의 음악에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모차르트, 나아가 음악이 가치가 있다는 식의 허황된 주장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은 모차르트 음악을 매우 사랑했다 합니다.) 결국은 “예측성과 실용성”이 있어야만 가치 있다는 주장의 반복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측성이 있어야 증명/반증이 가능하고, 증명/반증이 가능하지 않을 경우 “그 이론을 만드는 수고에 비하여 얻을 것”(즉, ‘실용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라는, 즉 실용성이 곧 가치라는 식의 연결 구조의 보조 논거일 뿐입니다. ‘실용성이 곧 가치고, 가치 있는 것이 곧 실용적’이라는 식으로 더 이상 인과적 설명이 이루어지지 않는 무한 퇴행의 단계라고 봅니다. 긴 논의를 통해 확실히 알게 된 것은 teferi 님이 “옳음과 그름”, “진정한 ○○”와 같은 명확한 기준에 대한 열망이 매우 크다는 점입니다. 위의 무한 퇴행이 발생한 원인도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실 이는 그리 특이한 현상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준거를 갈망하고, 불안정한 상태를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이러한 욕구와 불안을 해소하는 대표적인 집단 영역이 하나 있습니다. 종교입니다. 종교인은 옳음과 그름의 준거를 받고, 진정한 지향을 획득합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과학입니다. teferi 님은 이를 (수많은 근대인들이 그러하듯) 자연 과학에서 찾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또 수많은 사람들이 “옳음과 그름”, “진정한 ○○”을 파악하는 준거로 종교를 택하고 있기도 합니다. 과학은 실제로 무언가를 ‘보여’ 주었으나 종교는 ‘보여’ 주지 않았다는 식의 반박에 대해서 종교는 이미 여러 번 ‘기적’을 보여 주었으며, 여전히 많은 부분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따름이라고 다시 반박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미래 시점을 ‘미리’ 확인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기에 이러한 반박을 당위적 즉, 권위적으로 무시할 수는 있을지언정 소위 “과학적”으로 기각할 수는 없습니다. "예측 모델 구축은 보편적인 의미의 성과입니다. 어떤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도 결국에는 비슷한 상황에서 적용할 수 있는 이론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자연과학적 방법론이 분과학문의 특성과 자연과학적 방법론 구축으로 배제하는 요소를 무시하고 성과라고 치장하는 것이 성찰적이지 못하다는 말은 무엇이 옳은지도 그른지도 모르는 상황을 계속 유지해야한다는 것과 동의어입니다." 2009/11/30 01:24 하는 식의 말들에서 볼 수 있듯, 옳고 그름이 명확히 규정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선 지극히 당위적으로만 주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당위에 대한 teferi 님의 선택은 ‘과학’인 셈입니다. 이 역시 teferi 님의 당위입니다. “그렇다면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한 이론은 가치가 있을까요? 가치가 없거나, 있어도 매우 미미합니다. 왜냐하면 그 이론을 만드는 수고에 비하여 얻을 것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2009/12/07 17:13 이 부분에서 역시 ‘얻을 것’은 얕게는 도구적 실용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며, 더 깊은 층위에서는 (teferi 님의 입장에서는) 옳고 그름의 준거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 ‘실용성’에 대해서도 저는 다른 개념 규정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만, teferi 님께서는 해당 영역을 넘어서는 물리적/경제적/사회적 기여를 말씀하시는 것 같아 일단 그런 의미로 쓰겠습니다.) /* 사실 왜 “옳고 그름”이 명확해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인과적으로 파고들 여지는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 역시 합리성의 비합리적 토대인 ‘당위’에 부딪히게 될 것이라는 점 또한 명확해 보입니다. */ 여기서 1-1. 부분을 잠시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일단, 저는 인간의 ‘자유 의지’에 우월성을 부여한 적이 없습니다. 즉, 연구자보다 행위자가 자신의 의미세계와 행위의 이유에 대해 더 잘 알고 설명할 수 있다고 장담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연구자 또한 연구 대상과 같은 인간이라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즉, 연구자와 연구 대상인 가령, 일상행위자가 모두 나름의 의미 세계와 관점, 설명력 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배제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와 의미세계를 연구하는 영역에서는 치명적일 수 있다는 점을 주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행위란 문화 영역 내에서 구축된 맥락의존적 실천으로서, 연구자가 자신의 학적 영역의 ‘문화’에 기인한 해석과 관찰 통제 및 특정 요소의 배제를 통해 임의로 단순화할 경우 아예 다른 의미세계를 구축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특정 문화권의 이론적 전통 하의 연구자들은 모두 수긍하는 설명 방식을 해당 연구 대상 집단은 모두 코미디로 치부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연구자 집단이나 연구 대상 집단이나 모두 인간 집단이라는 점에서 어느 한 쪽에 무조건적으로 인식론적 우월성을 부여하기는 어렵습니다. 말씀하신 진화심리학이니 행동전력이니 하는 것들이 구축되는 과정은 바로 이러한 지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당위적인 차원에서 연구자의 인식론적 우월성을 전제함으로써 연구 성과가 연구 대상보다 연구 대상의 행위의 소위 (말씀하신) “진정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는 식의 인식을 내포합니다. 저는 그 연구 과정의 인식론적 우월성이 야기할 수 있는 오류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으므로, 그러한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는 연구 성과들은 이를 반박할 논거로 부적절합니다. 이는 연구자는 사람인데 대상은 사물인 경우와는 달리, 연구자도 연구 대상도 모두 사람일 때만 발생하는 문제로서 자연과학 영역에서는 고려할 필요가 없는 문제이지만, 인문사회(과)학 영역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지점입니다. 억지로 인간을 사물화하고 의미 단위를 물리 단위로 치부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왜곡은 약간의 손실 수준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세계를 창작하는 일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연구 대상의 개체수를 늘려 일종의 패턴을 발견하는 것은 사회과학 영역의 주요한 연구 방식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는 ‘전형성’을 획득할지언정 ‘보편성’을 획득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귀납주의의 한계에 따라 논리적인 비약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이것이 절대성을 담보하는 ‘진정한 이유’라고 말하기는 더더욱 어려우며, 오히려 공통적으로 측정 가능한 요소들을 통해 학자의 연구 습속에 따라 재구성된 설명 체계라고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방식으로 구축된 ‘전형성’이 오히려 연구 대상의 행위와 의미세계를 왜곡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찰적 연구는 레나토 로살도라는 인류학자가 잘 보여주는데, 그의 책에서 발췌한 부분(http://archum20.egloos.com/4279984)에서도 일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teferi 님의 “옳고 그름” 과 “진정성”에 대한 갈망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학문 연구 또한 학자라는 특정한 집단이 나름의 실천 양식과 집단적 습속에 따라 행하는 사회적 실천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teferi 님은 인간이 지닌 편향성을 연구자들이 다양한 개체들에 대한 cross checking 과정을 통해 배제함으로서 나름의 ‘진정성’을 확보한다고 하셨지만, 그렇다면 이러한 ‘진정성’을 확보하는 과정이라고 일컬어지는 학문 연구 집단의 실천적 편향성은 어떻게 제거되었습니까? (teferi 님은 이러한 편향성을 제거하기 위해 다양한 학문 영역들의 비교를 통해 공통된 전형성을 발견해 이를 차용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기보다는 자연과학 영역의 준거와 방식, 실천 양식을 여타 영역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시고 계신데, 이는 말씀하신 ‘진정성’을 구축하는 과정과 모순되지 않습니까?) 물리 단위의 세계를 연구하는 자연과학과는 달리 의미 단위의 세계를 탐구하는 인문사회(과)학 영역은 피해갈 수 없는 문제입니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러한 학자 집단의 실천 양식, 집단적 습속, 전형적 관점, 편향된 문제 설정 등의 복합체인 학자의 habitus를 scholastic point of view를 통해 분석한 바 있습니다. 자연과학 영역의 준거를 무조건 강제하기 전에 이러한 차이를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의 성찰적 문제는 학자 집단이 지닌 일종의 딜레마입니다. “옳고 그름”의 준거가 모호해지는 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에 그 기준을 무엇인가에서라도 찾아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지극히 당위적이며, 인간적이지만 감정적이고, 매우 권위적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기준을 자연과학 영역의 (해당 영역의 특성에 기인하여 구축된) 준거 하나로 치환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 역시 지극히 권위적입니다. 또한 제가 제시한 다양한 반례들에 대해 곧바로 ‘반증’하기보다는 다양한 추가 명제의 덧붙임과 개념에 대한 ‘다른’ 해석을 제시하며 이러한 당위적인 주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방식 또한 “권위 있는” 자연과학 영역의 준거와 방법론을 그대로 믿고 따른다는 점에서도 또 한 번 권위적입니다. 이런 식의 권위주의는 원문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비판하신 이유와 하등 다를 바 없습니다. 동시에, 이런 방식의 행위는 근본적으로 패러다임에 입각한 자연과학자들이 행하는 실천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옳고 그름”은 없어야 한다는 식으로 주장한다고 오해하진 마시기 바랍니다.) 2.2 의 "올바른 원인을 찾아낸 올바른 처방만이 진정으로 욕망을 충족", "가장 그릇된 사상"같은 식의 수사는 윤리와 당위의 영역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식의 ‘올바른’, ‘그릇된’, ‘진정’ 과 같은 식의 표현은 인간을 넘어선 절대적인 기준을 요구합니다. (연구자 집단이 절대적인 인식론적 우월성을 지닐 수 없음은 위에서 이미 보였습니다.) 하지만 실천의 영역에서 준거는 모두 인간의 집단적 실천을 통해 수용되고 체계화된, 즉 인간에 의해 구성된 것들뿐입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틀렸다’는 이유로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한 여러 실천집단들의 행위 결과 인명 피해가 많았다는 점을 드셨지만, 이런 식의 논의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떨어진 핵폭탄의 피해나 체르노빌 원전 방사능 유출 피해 등이 핵물리학 이론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타당성이 없습니다. 제가 논의의 첫머리에 한 말을 기억하시는지요. 비판 대상을 한정하셨으면 하는 아쉬움을 토로했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다양한 실천 집단이 있었고, 마르크스주의 이론 체계를 구축하는 학문 실천의 영역 또한 개별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주의’나 구축된 ‘이론’을 가져다 표방하며 실천하는 집단들은 해당 집단의 이익과 지향에 맞춰 이론을 발췌 해석하는 경향이 짙기 때문에 이러한 실천과 이론 체계 자체를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 때문에 저는 그 중 ‘이론’ 영역에만 한정해서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고요. 윤리적인 차원에서 미국의 핵폭탄 사용을 비판할 수 있듯, 윤리적인 차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한 특정 집단의 실천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윤리적인 차원에서 핵물리학 이론을 비판할 수 없듯, 마르크스주의 이론 역시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나, 이런 식으로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권위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더더욱 타당하지 않습니다. 원문에서 대충 감을 잡고 긴 덧글 논의 과정에서 확실히 알게 된 것은 teferi 님이 지닌 엄청난 자기우월적 인식입니다. 학문의 가치를 해당 영역에서 실제로 공부를 하는 이들이 지닌 기준들보다 자신이 선택한 기준에 따라 치환-재단할 수 있다는 주장, 자신이 속하지도 않은 영역의 지향이나 실천 방식 등에 대해서도 ‘내가 속하지 않았으니 잘 모를 수 있다’는 식의 생각보다는 일단 ‘내가 생각하는 게 맞을 것이다’는 식의 자만심 (실제로 이런 생각에 따른 여러 가지 주장을 반박당하고 철회함으로써 그렇지 않다는 것을 조금은 인정하시게 되셨겠지요), 이에 따라 철학, 역사학, 문학 전반과 여타 학문 영역(논리적으로 확장시키면 예술 활동과 같은 인간의 다양한 실천 양식까지도)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하고 그 중 “예측력과 실용성”을 획득하는 데 ‘이용’되는 지점에 한하여 사후적 가치를 취사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모두 자기우월적 확신에 기인한 인식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그토록 비판하신 마르크스주의 이론 영역을 구성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과 자신 중 누가 더 ‘권위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대체 누구시기에 이토록 엄청난 자기우월성을 담보하실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속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마르크스의 문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위한 실천만이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들을 비판하는 teferi 님의 주장의 기반 논거 또한 그들의 거친 논거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심지어 마르크스주의 이론 영역은 ‘속류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고 넘어선 지도 이미 오래입니다. 아무리 ‘반증’과 같은 자연과학적 양식을 통해 “옳고 그름”을 구축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더라도, 무조건 반증가능성이나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들이대기 이전에 먼저 이 ‘반증’과 ‘자연과학적 방법론’ 등의 타당성을 확보하는 ‘조건’에 대해 고려하는 것이 더 이치에 맞지 않은가 하는 생각입니다. 또다시 오래 기다려도 답이 없으시군요. 대충 수긍하신 것으로 받아들이면 될까요? (꽤 오래 덧글을 주고 받긴 했습니다 :) 과학의 비합리성에 대하여: 과학자 집단이 정상과학이라는 패러다임에 어긋나는 증거는 버린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패러다임론은 과학적 연구방법이 정립되지 않은 여러 학문과 초기 과학의 발전을 설명하는 데 적합하지만 과학적 연구방법과 과학 기초 이론의 발견 이후의 과학발전을 설명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과학은 지금까지 점진적으로 발전하였지 혁명적으로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학의 기초이론은 발견 이후에 지속적으로 적용되고 있으며 신 이론의 등장으로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뉴턴역학, 원자론, 진화론은 발견 이후 지금까지 과학적 사고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상대성역학과 양자역학은 뉴턴역학의 보완이지 대체가 아닌 것입니다. 아르님은 패러다임은 과거 패러다임이 모조리 오류라고 하고 있으나, 뉴턴역학의 패러다임은 오늘도 남아 있습니다. 과학이 완전하게 오류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 오류가 본질적인 부분에서 발생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뉴턴 역학의 본질 - 모든 물체는 힘을 가해야 운동하고 같은 운동 법칙에 따른다 - 과 원자론의 본질 - 모든 물체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자의 전기적 성질에 따라 물체의 특성이 정해진다 - 와 진화론의 본질 - 선택에 따라 점진적으로 구성된 유전물질을 이어받아 발생하지 않은 생명체는 없다 - 는 반박된 바가 없습니다. 특히 진화론에 대해서는 이를 공격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으나 모두 무용하였습니다. 진화론을 반박하는 과학적 증거를 찾으려는 집단이 존재하였으나 그들은 아직도 증거가 없이 무지에 호소하는 논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과학자가 권위를 가지고 특정 패러다임에 맞는 증거만 받아들인다면 진화론은 매우 쉽게 반박되었을 것이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진화론 뿐만 아니라 다른 과학이론도 점진적이고 과거 패러다임을 이어받아 구성되었으며, 다른 이론의 출현으로 과거 이론이 송두리째 반박되지 않았습니다.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을 비판한 칼럼을 인용합니다. '근대 과학의 성립 이후로 과학 혁명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과학법칙은 인간이 달로 갈 수 있다고 예측했고, 과학 법칙으로 이것을 가능하게 함으로 예측을 증명했습니다. 즉 기존의 과학법칙인 만유인력의 법칙을 몰랐다면, 인간이 달로 여행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만유인력의 법칙이 틀렸다면, 현재의 과학으로는 달에 가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을 안다면, 과학이 바뀔 수 있는 패러다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갑자기 논의의 심각한 퇴보입니까. '과학의 비합리성에 대하여'를 논의하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는데. 과학적 방법론, 준거로서의 예측력과 실용성, 그에 따라 구축되는 명확한 기준을 “옳음과 그름”, “진정한 ○○”으로 치환하는 행태에 이러렀는데 갑자기 '과학의 비합리성'이라니요. 근대 과학의 패러다임을 말할 때는 뉴튼역학은 여전히 완전히 부정되지 않은 패러다임으로 남습니다. 여전히 지배적인 패러다임의 한 축입니다. 현재 시점에서 당연히 '모조리 오류'라고 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게다가 제가 이전의 패러다임이 모조리 '오류'라고 말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있다하더라도 이는 뉴튼역학 이전과 이후의 비교에 유효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패러다임을 가지고 들어온 것은 그 자체가 권위로서 작용하기 때문에 자연과학영역도 탈권위적 객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게 아니라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이 점은 teferi 님도 인정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패러다임의 작동에서 말하는 '권위'는 오히려 지금과 같은 과학의 생산성을 담보하는 기제로서 설명되지 기존의 이론들이 "매우 쉽게 반박되"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정 패러다임이 공고한 권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반박이 잘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관찰의 이론의존성 명제를 기억해 주시기바랍니다. 권위는 작용하지만 권위'만'작용하지 않는다는 점 말입니다. 근대 자연과학 영역에서 핵심 이론들이 단순히 현재 반박되었다 그렇지 않다는 정도가 자연과학 영역의 절대적 우월성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논의의 흐름이었지 않습니까. 저는 자연과학의 성과를 부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옳고 그름의 단일한 기준이며 진정한 준거임을 비판하고 있을 뿐입니다. 게다가 저는 패러다임 이론의 전체를 옳다고 말하기보다는 자연과학적 방법론과 해당 영역이 지니고 있다 생각되는, 그리고 그러하다 주장하기를 원하시는 teferi 님의 주장에 대하여, 그 '절대성'을 담보할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오히려 그렇지 아니하다 생각할 수 있는 요소들이 패러다임이라는 방식으로도 제시되고 있다는 식의 주장이었습니다. 나아가, 해당 영역의 준거가 절대적 위상을 지닐 수 있다는 이유로서의 실증적인 결과 또한 임의적이며, 이를 지향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논의의 시발을 기억해 주십시오. 과학적방법론을 따르지 않는다고 '틀렸다'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영역간의 차이며 과학적 방법론이 지닌 비합리적 토대(를 포함하여 전 영역에 있는 비합리적 토대를 말하고자)니 하는 말들이 나왔던 것입니다. 이전 덧글의 마지막 문단을 다시 붙여 놓겠습니다. “아무리 ‘반증’과 같은 자연과학적 양식을 통해 “옳고 그름”을 구축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더라도, 무조건 반증가능성이나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들이대기 이전에 먼저 이 ‘반증’과 ‘자연과학적 방법론’ 등의 타당성을 확보하는 ‘조건’에 대해 고려하는 것이 더 이치에 맞지 않은가 하는 생각입니다.” 저는 이 '조건'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절대성과 우월성을 무조건적으로 주장할 수 있느냐는 의문으로 마무리했었습니다. 본인의 자기우월적 인식에 대하나 정당화가 가능한가 하는 질문과 함께 말입니다. 과학에 대해 패러다임론에 의거하여 향후 패러다임이 교체될 것이기 때문에 권위적이고 절대적이지 않다는 식의 논의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근대과학의 성립이후 패러다임은 변화하지 않고 오히려 패러다임을 보충하는 이론과 증거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물론 귀납논리이기 때문에 과학이 문자 그대로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과학의 영역에 있는 다른 이론과 비교해서는 과학이론은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과학보다 더 많은 성과를 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과학만큼의 신뢰도를 부여할 방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향후 패러다임이 교체될 가능성만 보고 과학적인 검증도 거치지 않은 다른 이론에 과학이론과 같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넌센스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기존 과학이 통제된 실험과 관찰, 가설수립과 검증으로 이론형성이라는 연구방법론이 적용되는 분야에서는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다음 논의는 사회과학이 과학적 연구방법론을 적용할 수 있느냐인데, 과학적 연구방법론을 현재시점에서 적용하기 힘든 분야가 있고 적용할 수 없는 분야가 있습니다. 통제된 실험을 실시하지 못한다면 의미있는 인과관계를 확인할 수 없기에 일반적으로는 과학적 연구방법론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이를 적용하기 어렵기에 과학적이지 않다고 비판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맑스주의의 경우 동일한 연구대상인 경제를 판단하는 다른 이론, 즉 주류경제학 이론이 있습니다. 주류이론의 경우 실험하지는 못하더라도 관찰에 근거한 실증분석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습니다. 두 이론의 적용 결과만 보더라도 주류이론중 하나인 케인스이론에 근거한 정부지출은 이번 경제위기가 공황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았으며, 냉전시 자본주의진영의 경제는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맑스주의경제학에 기반한 사회주의국가의 경제운영은 하나같이 파탄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결과의 차이는 두 이론의 연구방법론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주의 붕괴이후에도 맑스주의자는 동일한 영역에서 많은 성과를 올린 기존 이론을 여전히 무시하고 음모론적으로-기존 이론은 부르주아의 지배를 위한 음모에 불과-부정하고 있습니다. 그 오류로 말미암아 수백만내지 수천만의 사람이 죽고 수억의 사람이 고통받았다는 것을 볼 때 이는 대단히 심각한 잘못인 것입니다. 기존의 논의가 어디에 있었는지 짧게 복기하겠습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지점들은 이미 위에서 논의가 진행된 부분들입니다. '절대적'이란 것은 비교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님도 이미 언급했고, 말씀하신 '성과'의 차이는 무엇이 '성과'인지의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 또한 언급했습니다. 이 때문에 "실용성과 예측력" 논의가 진행되었던 것 아니었습니까? 바로 그 '성과'가 "실용성과 예측력"에 국한되어야만 하는 이유를 묻고 있는 지점이었습니다. 자연과학의 정교한 인과적 모델이 지닌 예측력이나 나름의 성과들에 대해 저는 한 번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하여 다른 영역들의 고유한 가치가 부정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즉 특정한 영역의 조건과 특성에 특화된 방법론과 준거 지향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틀린 것'이 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에 대한 반대였을 뿐입니다.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등치 가능한 용법으로 사용되는) "동등"함과 "대등"함의 차이를 부여하여 논의를 전개했었습니다. '실용성과 예측력'만이 준거가 아니어야 한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 영역 간 조건의 차이에 따라 비교할 수 없는 고유성들을 제시함으로써 단일한 준거로 비교하는 행위의 오류를 지적하고, 이에 따라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동등'하다는 식의 논의를 진행했었습니다. 여기서도 결국 왜 제시하신 단일한 기준인 "예측력과 실용성"이 영역들의 상이한 조건을 배제해야 하는 절대적인 위상을 차지하는가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었습니다. 이 지점을 정당화하기 위해 teferi 님께서 그것만이 유일한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된다는 식으로 논의를 밀고 나가셨었습니다. '비교우위가 올바름'이라는 식의 말씀도 하셨었지요. (저는 이에 대해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 이론도 예측력이 0%로는 아니니 상대적으로 덜 올바를 뿐 틀린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하는 식의 질문을 했었는데 답은 없었습니다. 이는 단지 비교우위가 올바름이라면 어느 지점부터 옳음이 그름으로 전환되는지에 대한 기준도 인위적으로 설정해야 하는 문제가 추가적으로 발생한다는, 하지만 이 기준은 딱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세부적인 문제제기 정도였습니다.) 또한, 개개인은 자신에게 '진정한' 이익이 되는 이론을 선택하는데 이는 곧 "예측력과 실용성"이 있는 이론을 의미한다는 식으로도 말씀하셨고, 저는 이에 대해 '개인에게 이익'이 되는 지점이 상이할 수 있음을 지적하며 그 '진정한 이익'을 판별하는 기준을 다시 물었었습니다. 이는 마르크스가 개개인을 초월한 '진정한 이익'인 계급적 이익이 존재하며 개개인은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이를 보지 못하지만 마르크스 자신은 이를 포착하고 제시하고 있다고 하는 점과 하등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스스로 권위적이라 비판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이론과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판별할 수 있는 인식론적 우월성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 논의가 다다른 지점이었습니다. 논의를 이어간다면 여기서부터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과학적 연구방법론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이를 적용하기 어렵기에 과학적이지 않다고 비판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인지하게 되신 점은 기쁘게 생각합니다. 일부분이지만 분명한 합의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사회과학 영역은 많은 부분은 경험적 실증주의에 입각한 양적 방법론을 포함하는 과학적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경제학' 분과는 그러한 지점이 매우 특화된 영역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특화 때문에 지니는 장점만큼이나 그 과정에서 대상인 인간 행위(경제 역시 인간 행위의 총체입니다)의 어떤 부분은 왜곡하고 심지어 배제하는 과정을 통해 사회실재가 구성되며 이것이 심각한 문제라는 식의 비판도 함께 존재합니다. 여타의 사회과학영역은 계량화와 실증분석에 입각한 양적방법론과 함께 질적방법론, 그리고 이론 영역의 통찰 및 상상력까지 다양한 관점의 접근을 동시에 시도함으로써 이러한 경제학이 지닌 이러한 비판 지점을 줄이기 위한 나름의 시도를 또 지니고 있습니다. 어느 관점을 취하느냐에 따라 비판의 지점은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느 하나가 '절대성'을 주장하기 전에 '먼저' 각 영역이 지닌 '조건'들이 상이하다는 점을 주지하고 이를 무시할 수 있을만한 타당한 이유를 제시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사회과학'과 '자연과학'과 같이 그 상이성이 더 큰 경우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사회과학과 과학적방법론에 관한 논의는 이러한 지점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제가 계속 진행시켜 온 논의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 좁혀서 이야기하신 부분에 대해서라면 일정부분 일리가 있습니다. "두 이론의 적용 결과만 보더라도 주류이론중 하나인 케인스이론에 근거한 정부지출은 이번 경제위기가 공황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았으며, 냉전시 자본주의진영의 경제는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맑스주의경제학에 기반한 사회주의국가의 경제운영은 하나같이 파탄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결과의 차이는 당시의 두 이론의 연구방법론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는 말을 과학적 방법론이 구축하는 인과모델의 효과에 대한 언급이라는 정도라면 말입니다. 다만 원문에서처럼 마르크스주의 이론 자체를 기각하기에는 불충분합니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추출해 간 '속류 마르크스주의'적 지점들은 이미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 사이에서 많은 비판을 받고 있으며 일정 부분에 대한 기각 및 수정 보완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지점들을 무시한 채 마르크스주의 이론 자체를 틀렸다고 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저의 '첫 번째' 덧글이었습니다. 만약 속류 마르크스주의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실천 집단들의 행태에 대해 구체적으로 비판을 하셨었다면 이런 논의는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수백만내지 수천만의 사람이 죽고 수억의 사람이 고통받았다는 것"이 어떤 자료를 근거로 나온 수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속류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한 집단들의 행태로 말미암아 고통받은 사람들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은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지점에 대해서는 이미 첫 번째 답글에서 인정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논의에 포함될 이유가 없습니다. 애초에 ['권위' vs '과학']의 구도에 대한 저의 문제제기에서 시작한 논의였음을 상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비판의 영역과 대상을 좁혔었다면 하는 아쉬움은 저의 첫 번째 덧글이 담고 있는 내용인데,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크고 많은 영역을 단순화하여 담고자 하니 이런 식의 세세한 결들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절대적이라는 말은 비교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지만 실제 적용될 때는 그와 유사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치료할 때 입증된 과학적 이론에 따른 의학적 치료와 무당의 굿을 비교한다면, 무당의 굿은 단 한 번도 행해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적 비교우위가 있다는 말은 과학이 이미 정립한 이론적 대상에 대해 비과학적 이론에 따른 행위가 나돌아다니는 상황을 막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의 진정한 이익이라는 단어는 그 이론이 예측력이 얼마나 있는지를 측정하기 위한 단어입니다. 사람의 이익은 당연히 각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자신의 이익을 가장 잘 알고 있으므로, 그 자신이 바라는 것을 문자 그대로 이룰 수 있을 때 그 사람에게 가장 이롭다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지려면 a를 투입했을 때 b가 나온다는 이론의 인과관계가 아주 정확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내가 병이 나서 낫기를 바랄 때 과학적 이론이 뒷받침된 의학적 치료를 시도할 수 있고, 기도할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의학적 치료를 받으면 병이 낫는데, 기도하면 병이 나을수도 있고 낫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병이 낫지 않으면 주위의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은 그것이 가치있는 인간으로 만드는 신의 시련이기에 참고 견디라고 합니다. 이럴 때 기도하면 병이 나을 수도 있고 병이 낫지 않으면 가치있는 인간을 만드는 시련을 받을 수도 있어서 의학적 치료를 받는 것과 동일한 가치를 가지는가?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처음에 원한 것은 문자 그대로 병이 낫는 것이지, 시련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말 돌리기는 어느 비과학적 이론을 보아도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적이론은 어떤 것을 원하면 어떤 것을 투입해야 한다고 정확하게 규정하고 있고 그것을 투입하면 곧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진정한 이익이라는 것입니다. 수백만에서 수천만의 사람이 죽고-> 스탈린의 대숙청,대기근과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베트남 공산화 통일시 "재교육"을 의미한 것입니다. 위키백과의 수치에 따르면 대숙청은 7십만명에서 2백만명의 희생자, 우크라이나의 대기근만 해도 5백만명에서 천만명의 희생자, 대약진운동은 2천만명에서 5천만명의 희생자, 문화대혁명은 75만명에서 300만명의 희생자, 베트남의 "재교육"은 8백만명에서 천만명의 희생자를 냈다고 하고 있습니다. 수억명의 사람이 고통받았다는 것은 그와 같은 혹독한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파탄을 감내해야 했던 중국, 소련, 베트남의 인구를 의미합니다. 예측력의 정도로 표현되는 상대적인 덜 올바름은 일반적으로는 그 이유만으로 배척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 전체를 다루는 이론에서 이 차이는 민주주의와 독재, 풍요로움과 기근, 인권의 보호와 무자비한 학살이라는 극단적인 차이를 불러왔습니다. 맑스 자신은 이런 사회를 결코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맑스는 자신이 추구한 공산주의 사회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에 비해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아무도 하나의 배타적인 활동 영역을 갖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그가 원하는 분야에서 자신을 수양할 수가 있다. 그리고 사회가 생산 전반을 통제하게 되므로 각 개인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오늘은 이 일을, 내일은 저 일을, 즉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 때는 소를 몰며, 저녁 식사 후에는 비평을 하면서, 그러면서도 사냥꾼으로도 어부로도, 목동으로도, 비평가로도 되지 않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맑스 자신이 바란 이 사회를 문자 그대로 만들기는 커녕 오히려 지구상의 생지옥으로 만들어버린 맑스주의자들은 그 지점에서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이는 예측력이 단순히 떨어지는 수준을 넘어서, 역의 예측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인민의 세상을 만들기 위한 행위를 하면 인민의 지옥을 만들고 인민의 생활을 풍요롭게 만들려고 하면 인민을 굶주리게 만드며 인민을 보호하려고 하면 인민을 죽이게 된다는 역의 인과관계가 실현된 것이 바로 맑스주의자의 이론 실천 결과입니다. “상대적 비교우위가 있다는 말은 과학이 이미 정립한 이론적 대상에 대해 비과학적 이론에 따른 행위가 나돌아다니는 상황을 막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라는 말인즉슨, 인과적인 논증보다는 이미 의도가 우선하는 규범적인 주장과 논의였다는 말이군요. 저는 과학이 지닌 특정한 방식의 비교우의와 성과를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이어서는 안되는 이유들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tereri 님은 자연과학으로 여타 영역을 단일하게 재단하며 자연과학 영역이 준거로사 적용해야 한다는 규범적인 의도를 전제한 채 '절대적'이라고 전략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이게 곧 자기가 믿고 밀어붙이는 토대, 즉 스스로에게 작용하는 '권위' 아닙니까? 자연과학의 '합리성'과 성과를 적극적으로 긍정하시는 분이시기에 어느정도는 인과적 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납득과 대화가 가능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이런 식의 노골적인 '의도'가 전제되어 있었음을 밝히시니, 잠시 말을 잃었었습니다. 스스로의 '비합리적 토대'에 의거하여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비합리적 토대'를 비판하는 일의 모순에 대해 되돌아보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자신의 이익을 가장 잘 알고 있으므로, 그 자신이 바라는 것을 문자 그대로 이룰 수 있을 때 그 사람에게 가장 이롭다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2009/12/29 21:42 라고 하신 부분은 예전에 “특정한 학문을 학습하기로 결정한 것과 그 학문이 진정으로 개인에게 이익이 되는지는 서로 별개입니다. 개개인의 비합리성, 인식의 오류로 인해 개개인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개개인의 선택이 기준이 아니라, 그 이론의 예측력이 같은 대상을 목표로 하는 다른 이론과 비교하여 얼마나 뛰어난지가 올바름의 기준이 되는 것이며, 그러한 올바름은 결국 선택의 이익으로 뒷받침된다는 것입니다.” 2009/11/30 01:24 라고 하시며 인간이 '비합리성'과 '인식의 오류'를 지니고 있어 스스로의 이익이 대해 항상 제대로 판별할 수 없음을 지적하신 부분과 모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신이 바라는 것을 문자 그대로 이룰 수 있을 때”가 아니라 “그 이론의 예측력이 같은 대상을 목표로 하는 다른 이론과 비교하여 얼마나 뛰어난지”를 따져 보아야 한다고 하셨었습니다. 즉, 개개인이 항상 스스로에게 '진정한 이익'이 되는 것을 알고 선택할 능력은 없으므로, 어떤 개인들이 '예측력과 실용성'이 아닌 다른 기준으로 어떤 이론을 선택했다는 점은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이론이 지닌 (모든 영역의 특성을 무시한 채 준거로서 작용해야만 하는) '절대성'을 상대화 할 수 있는 근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개개인의 인식을 부정하면서까지 스스로에게 '인식론적 우월성'을 부여하며 “예측력과 실용성”을 절대적인 준거이자 '진정한 이익'으로 향하는 단일한 매개로서 주장하는 것은 스스로 권위적이라 비판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지점과 다를 바 없다고 반박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스스로의 주장과 반대되는 방식으로, 이제는 개개인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으며, 심지어 “그 자신이 바라는 것을 문자 그대로” 이룰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사람에게 가장 이로운 것(즉, '진정한 이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소하실 생각이십니까. 예전의 주장을 포기하고 지금의 주장을 고수하며 개개인이 스스로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인식하고 이를 이루기 위해 특정한 이론을 선택하는 것으로 이론의 '가치'를 선택한다면, 제가 지금껏 주장한 바처럼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이론의 가치가 그 절대성을 상실하고 단일한 준거로서 작용할 정당성의 토대를 잃게 됩니다. 즉, 상대화가 가능합니다. 들어주신 예시처럼 물리적인 영역에 종속되며 작용-반작용의 즉각적이고 인과적인 반응 체계로서 이룰 수 있는 '바라는 것'에 대하여 자연과학 영역의 환원주의적 경험검증 체계 및 이론은 큰 성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 대해서 저는 한 번도 부정한 적이 없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아프면 의사의 전문성에 자기 몸을 온전히 맡기는 것은 그 성과의 덕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개인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자연과학 영역의 방식으로는 포획하지 못하는 바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개인이 '마음의 평안'을 바란다면 이는 정신의학에 의존할 수도 있지만, 종교 체계나 스스로 납득할만한 설명 체계로서의 라깡 이론 등에 의존할 수도 있습니다. 한 개인이 '더 나은 세상'을 바란다면, 이는 '무엇이 더 나은 세상'인지를 규정하는 이론 체계에 우선 의존할 수 있고, 나아가 그것을 이루는 방식으로서 신자유주의 경제 이론에 의존할 수도, 혹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의존할 수도 있습니다. 또 한 개인이 특정한 사회현상에 대해 '이해' 하고, 혹은 '설명'하는 것을 '바랄 때' 한 개인은 구조주의적 이론을 선택할 수도, 행위자 중심의 이론을 선택할 수도 (물론, 현대 사회학 이론은 이 둘의 이분법적 대립구도를 극복하는 추세입니다)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일정 정도의 자기 영역을 확립한 이론 체계의 경우 나름의 설명력과 체계가 있기에 각각 납득할 만한 '이해'나 '설명'을 제공하는 지점이 있으므로,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합니다. 이러한 '바라는 것'과 그 '대상'의 특성과 조건의 차이가 제가 말하는 분과 및 영역들의 차이들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자연과학적 방법론만이 절대적인 준거로서 모든 영역의 특성을 무시하며 해당 이론 영역의 '옳고 그름'을 재단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하신 부분들은 이론 자체에 대한 비판보다는 실천 집단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는 것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이론은 그 자체로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영역을 구축하며 내부적으로 상호 비판을 통해 특정 부분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특정 부분은 수정하거나 기각하며 내적 체계화를 공고히 해 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처음부터 '속류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 영역에서 거의 퇴출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씀드리며, 비판의 대상을 구체화 할 필요가 있다고 여러 번 지적해 왔던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감응하며 그들의 고통에 대한 원인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선한 의지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teferi 님이 지니신 선의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시는 논리가 마르크스주의 이론 자체를 기각하기엔 부족해 보입니다. 제가 예전에 말한 바대로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다양한 실천 집단이 있었고, 마르크스주의 이론 체계를 구축하는 학문 실천의 영역 또한 개별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주의’나 구축된 ‘이론’을 가져다 표방하며 실천하는 집단들은 해당 집단의 이익과 지향에 맞춰 이론을 발췌 해석하는 경향이 짙기 때문에 이러한 실천과 이론 체계 자체를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저는 그 중 ‘이론’ 영역에만 한정해서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었다고도 언급했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논거만으로 한 발 더 나아가 고전적인 자유방임적 시장주의 경제학에서 하이에크, 프리드먼, 뷰캐넌 등의 이론에 입각한 현대의 신자유주의까지 이어지는 소위 '우파적 경제학 이론'의 '승리'를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와 독재, 풍요로움과 기근, 인권의 보호와 무자비한 학살이라는 극단적인 차이"라 표현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진실의 단편'을 담고 있으되 문제 또한 많은 표현으로 보입니다. 소위 '우파적 경제학'에 의거한 사회정치경제체제의 등장에 따라 보장된 '인권'만큼 그로 인해 배제된 '인권'도 존재하며, 체제의 논리에 따라 발생한 '풍요로움'의 불평등한 분배가 야기한 고통들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어느 체제나 장점과 단점이 있으며 그에 따라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하는 것이 극단적이지 않은 선택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개량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지점은 우파 경제학을 발췌 적용해 구축된 체제나 다른 이론 체계의 영향을 받아 구축된 체제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저는 혁명주의자도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여 마르크스주의 이론체계 자체가 기각될 수 있는 수준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논의는 그러한 의미에서 이론체계에 집중해 시작하였으며, 때문이 실천집단에 대한 비판과 분리시키기 위해 이론적인 논의들을 진행시켰던 것입니다. 올 해의 마지막 날이네요. 나름 긴 논의였습니다. 헌데 논의가 슬슬 헛돌기 시작하는 듯합니다. 논의가 도돌이표를 찍기 시작하면 멈출 시점에 가깝다는 뜻으로 생각합니다.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경청하겠습니다만, 논의가 퇴보하거나 순환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적당히 마무리를 지으시고 싶으시다면 그리 하셔도 존중하겠습니다. 어차피 일 월 중순이면 컨퍼런스 참관 겸 여행을 떠나게 되어 시간제한도 생기고, 상황이 변화니 이 논의에 대한 제 이해관심도 어느 정도 변화가 있네요. 비판의 층위가 분리될 필요가 있는 부분, ‘권위’에 대한 비판 지점과 그 비판의 준거로서 작용하는 ‘권위’에 대한 부분, 스스로 주장했다 기각했던 부분 등에 대해서 한 번 쯤 돌아볼 수 있는 논의였기를 바랍니다. 나름 재미있었습니다. 기독교의 기도에 대한 설명처럼 투입시 예상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정당화하는 이론에도 사람이 많이 빠져듭니다. 그것이 바로 개인이 자신의 진정한 이익을 인식하지 못하는 현상인 것입니다. 따라서 저의 말은 모순이 아닙니다. '어느 꼬마의 마루밑 이야기'라는 치카노 문학에 속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소설에서 바람도 통하지 않고 뙤약볕이 찌는 들판에서 일하다 일사병에 걸려 심하게 앓는 아버지와 그에도 불구하고 다시 들판에 나가 일하다 일사병에 걸린 어린 동생을 가진 아이가 나옵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독실한 신자로 매주 헌금하고 매일 기도하지만 그 아이는 왜 기도를 매일 하는데도 우리는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느냐고 반문하죠. 그 어머니는 '가난한 자여, 천국이 너희에게 있느니라'는 성경말씀만 되뇌일 뿐입니다. 그 아이와 어머니가 진정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일사병에 걸려 고통받지 않는 것, 일사병에 걸리지 않아도 되도록 경제적 여유를 갖추거나 다른 쾌적한 근무환경을 가진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것 등등일 것입니다. 종교는 이 모든 욕구에 대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욕구가 천국에서나 실현될 수 있을 거라는 공허한 약속을 할 뿐이죠. 그 어머니가 기도하고 성경말씀을 되뇌는 것이 정말 자신의 남편과 아이가 고통받더라도 천국에 가는 것을 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다만 종교라는 멍청하고 악랄한 체계가 사람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진정한 해결책을 찾는 것을 방해할 뿐입니다. 만일 그 어머니가 종교활동에 쓴 돈과 시간만큼만 자신이 당면한 문제를 푸는 지식을 쌓는데 투자했으면 분명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마음의 평안을 바라고 종교든 라깡이론이든 뭐든 의존해서 그 결과를 이끌어내기만 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과학적이론이 문제가 되는 것은 투입하고 결과가 나온다는 검증이 전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라깡이론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는 아이추판다님의 블로그에 보면 라깡이론의 여러가지 잘못을 실제 사례를 들어 비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아의 거울단계이론이 허구라는 것을 녹화영상으로 반박하고 있죠. 만일 어떤 사람이 유아의 정신적 평안을 위해 라깡의 거울단계이론을 사용한다면 처절한 실패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더 나은 세상을 꿈꿀 때는 여러 이론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맑스가 말하는 더 나은 세상을 꿈꿀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꿈이 현실로 이루어졌을 때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중요한 것은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는가 입니다. 맑스주의자들이 최종적으로 바라는 것이 맑스주의가 규정하는 것을 투입했는데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맑스주의에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바라는 이상향이 a든 b든 c든 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이론에 따라 요구하는 투입을 했는데 투입하면 나온다고 예측된 이상향이 그대로 나오지 않는 경우가 문제인 겁니다. 이를 여러 핑계를 대며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더라도 문제는 그대로 남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자신의 이익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말을 하면서도 동시에 “개개인의 비합리성, 인식의 오류로 인해 개개인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선택을 하는 경우”의 현상적 모순을 해소하는 논거로서 “종교라는 멍청하고 악랄한 체계가 사람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진정한 해결책을 찾는 것을 방해”한다며 특정한 이론체계가 개인의 ‘진정한 이익’을 직시하고 선택하게 하는 것을 막는다는 설명은 권위적이라 비판하신 마르크스의 ‘계급적 이익’과 이를 직시하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막는 ‘허위의식’에 대한 설명과 매우 흡사해 보입니다. 이에 대한 해명 바랍니다. 이는 제가 줄기차게 물었지만 답을 듣지 못한 ‘인식론적 우월성’ 부분에 대한 해명으로 이어져야 할 부분입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마르크스에 대한 인식론적 우월성을 부여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한 것을 그는 보고 해명했다고 믿는바 그에 대한 현상적 반례들을 기각하기보다는 추가 논거들을 더하는 방식으로 체계의 보완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 입장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 영역이 지닌 권위성은 이러한 지점에 기인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러한 권위의 작용은 여타 이론 및 자연과학 영역에서도 발견된다고 보며, 이를 무조건 기각해야 할 종류의 권위로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권위적이라는 이유로 마르크스주의 이론 영역을 기각하고자 하는 teferi 님이시라면 그 비판의 대상인 ‘인식론적 우월성’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며 자신의 논리를 진행하는 지점에 대해서는 반드시 해명하셔야 한다고 봅니다. 만약 스스로에게 ‘인식론적 우월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개개인이 자기 이익을 가장 잘 알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하지만 그들은 종종 자신의 ‘진정한 이익’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해 잘못된 선택을 한다는 식의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는 그들은 자신의 ‘진정한 이익’을 종종 모르지만, 내가 보기엔 그들이 진정한 이익을 선택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는 생각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가 개개인의 ‘진정한 이익’인 계급적 이익에 따라 사람들이 행동해야 하지만 ‘허위의식’인 부르주아지 이데올로기의 은폐 작용에 의해 개개인이 ‘진정한 이익’을 인지하고 행동하지 않아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있으며, 이를 폭로하는 자신의 작업이 ‘진정한 이익’을 깨닫게 할것이라는 인식론적 우월성을 스스로 부여한 지점과 teferi 님이 스스로에게 인식론적 우월성을 부여하는 지점의 ‘권위’가 다르지 않다면 (최소한 이론 영역에 대해) 전개하고 계신 비판 자체에 대해 재고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논의를 지속하시려면 이 ‘인식론적 우월성’ 부분에 대해 우선 답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논의가 헛도는 것이 조금이나마 줄어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예시 부분은 부연하겠습니다. ‘마음의 평안’ 부분은 제가 오해의 소지가 있게 기술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라캉 이론을 과학이라 주장하지 않으며, 인터넷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도 주지하고 있습니다. 라캉 이론이 여러 가지 실증적 검증을 통과하지 못했음을 인지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해 현상에 대한 나름의 체계적인 설명을 구하고 이를 통해 마음의 평안을 얻는 이들에 대해 생각하며 언급한 것이었습니다. 즉, 유아의 마음의 평안이 아니라, 라캉의 이론을 통해 현상에 대한 설명적 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바라는 이들의 마음의 평안입니다. ‘바라는 것’이 주관적이고 내적일수록 실증적인 검증과는 별개로 그 언어적 세계가 지닌 체계와 결만으로도 충분히 그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으며, 이는 물리적인 차원에서 ‘질병을 고치는 것’과 함께 개개인이 ‘바라는 것’의 넓은 스펙트럼을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개인에게 질병이란 것 또한 완전히 물리적인 영역의 문제는 아님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진 않겠습니다.) 특정한 현상을 ‘설명’하거나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에 대해서라면 실증적인 투입-산출의 함수적 체계가 아니더라도 충분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제가 제시했던 구조중심의 사회이론과 행위자중심의 사회이론의 예시를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각각의 이론 체계는 적용 가능한 지점과 그렇지 않은 지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지점’이 ‘그러한 지점’을 통해 제공되는 설명력이나 현상에 대한 이해의 층위를 모두 기각할 수 있는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론이 보완되고 때론 수정되며 발전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바라는 것’이 물리적인 영역에 가까울수록 투입-산출이 명확한 자연과학적 인과모델체계가 이를 이룰 수 있는 길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이는 분명한 근대 자연과학의 성과입니다. 하지만 개인이 ‘바라는 것’은 지극히 내적인 의미의 층위도 존재합니다. 가령,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바라는’ 사람에게 자연과학 체계가 줄 수 있는 답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해당 개인에게 불충분할 수 있으며, 이럴 경우 이는 개인에게 충분한 ‘이익’이 아닐 것입니다. 철학이나 인문학 영역의 다양한 이론적 체계들이 이러한 ‘바라는 것’에 대하여 답을 제공하려 노력합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검증은 투입-산출의 과정으로 거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회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부터 특정 사회 현상에 대한 설명 및 이해를 ‘바라는’ 사람에게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 이론들은 나름의 결과를 제공합니다. 저는 이러한 설명체계들이 ‘옳고 그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신바대로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가장 잘 알고 있”으며 이를 이루는 것이 이론의 가치를 결정한다면 개개인이 ‘바라는 것’은 그 층위가 다양하며 그 층위의 다양성이 학문 영역과 이론체계의 다양성이라는 결과로 현재 나타나고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바라는 것’의 다양한 층위가 실증적으로 검증 가능한 영역에 한정되지 않는 한 영역의 다양성과 그 가치 평가 또한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단일한 준거로 치환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라는 것’의 스펙트럼을 넓게 제시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하신 질병과 기도의 예시는 일견 타당한 지점이 있습니다. 실제로 현대 의학을 통해 해결 가능한 질병에 대해서 종교체계에만 의존하는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은 종교 외 모든 영역을 거부하는 맹목적인 관점을 지니지 않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는 공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 예시도 문제는 있습니다. 역시나 인식론적 우월성에 대한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주어진 예시라는 점입니다. 저는 종교인이 아니지만 최소한 종교인이 지닌 의미세계에 대해 일정 정도의 존중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도가 ‘응답’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이가 해당 종교가 제시하는 ‘구원’을 (그것이 공포의 반대급부이든 자신의 의미세계의 중심이든) 강하게 바라지 않는다면 귀납추론의 논리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시점에선가 기도 외 다른 방법을 (혹은 최소한 함께) 모색할 것이라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하지 않는다면 이는 개인이 ‘바라는 것’이 현재적 고통을 초월한 무언가―여기서는 ‘구원’이라 하겠습니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 개개인이 속한 영역과 그들의 의미세계를 독단적으로 재단할 수 있다는 우월적 인식이 없는 저로서는 그들의 목소리에 대해서 어느 정도 귀를 기울여아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teferi 님은 “그 어머니가 기도하고 성경말씀을 되뇌는 것이 정말 자신의 남편과 아이가 고통받더라도 천국에 가는 것을 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어머니’가 실제로 다가와 자신은 지금의 고통이 슬프지만 천국에 가는 것을 원한다고 말을 하더라도 teferi 님은 당신은 악랄한 종교 체계에 속고 있을 뿐이라고, 자신의 인식론적 우월성에 입각하여 계속 말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이 역시 위에서 질문한 것처럼 스스로에게 부여한 ‘인식론적 우월성’을 해명할 때 받아들일 수 있는 지점인 것 같습니다. 자연과학 영역의 이론은 대상의 특성 상 투입-산출에 입각한 경험적 인과체계 모델이 그 핵심이며 총체입니다. 하지만 모든 이론체계가 자연과학적 모델로 이루어진 것만은 아닙니다. 영역 간 경계를 초월하는 보편적인 개념으로서의 이론은 그 영역의 다양성만큼 그 개념 또한 넓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물리세계와 동시에 의미세계에 살고 있으며, 그에 따라 인간이 ‘바라는 것’이 지닌 다양한 결과 층위들이 있습니다. (자연과학 영역을 넘어선) 총체적 의미의 이론이란 이러한 결들에 부합하는 개념이어야 할 것입니다. 정해진 일정 때문에 시간제한은 있지만, 시간이 되는 한까지 성실히 답을 하겠습니다. 다만, 제가 제시한 인식론적 우월성에 대한 지점부터 먼저 답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새해입니다.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밤샐 일이 있어서 길게 적지는 못할 것 같군요. 다시 이 블로그에 들를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구요-기억난다면 다시 들르겠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습니다. 저와 다른 정치적 입장으로 놓고 봐도 그렇지만, 그것까지 얘기하다가는 할 일을 못할 것 같네요. 다른 것 다 제하고, 서로 공부하는 사람 입장에서 가장 아쉽게 느껴지는 점은 teferi님의 '틀림'에 대한 생각입니다. 진지한 맑스주의자들은 모두 다른 사람 이론에서 상당 부분 배우는 거 아시는지. 리카도의 경제학과 헤겔 철학이 맑스에게 큰 영향을 끼쳤음은 유명하죠. 왜 그럴까요? 한 사람의 생각에는 언제나 그 기반이 있습니다. 아무리 뚱딴지같은 생각에도 합리적 진실은 있기 마련이죠. 님도 분명히 님이 가진 사고의 틀이 있을 겁니다. 그 사고의 틀에서는 물론 님의 생각이 가장 옳은 것일 겁니다만,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서 어느 면이 옳고 어느 면이 그른지를 설명하시면 훨씬 설득력이 있을 것 같군요. 그 옳은 면을 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맑스주의자들이 존재하는 겁니다. 맑스주의의 옳고 그름을 따지려면 배우실 게 많을 것 같군요. 맑스주의는 정치학과 철학, 역사학과 경제학의 범주를 모두 끌고 가지 않으면 하나의 완결된 이론이 되지 않습니다. 주장하신 내용으로만 맑스주의를 설명하면 제가봐도 설득력이 크게 떨어지는 이론이 되는군요. 경제 부분에 대한 더 체계적인 설명이 없으면 저건 비맑스주의적 구조주의, 그것도 근거가 크게 부족한 구조주의가 됩니다. 제가 아는 한 교수님-저는 그 교수님의 합리적 접근을 좋아하지만, 저는 그 분의 우파 사상을 비판합니다-은 '비판할 수 없는 이론은 허무맹랑한 이론이다'라는 말을 하셨죠.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는지. 이 글은 비판이 어렵습니다. 포퍼의 반박가능성 얘기 아닌가? 지금 세상에 무슨 대단한 주장이라고 되는듯이 얘기하네 ㅋㅋ 아니 요즘은 왜그리 경제중심의 이론들만이 설치는지 알 수가 없군요.
위에서 과학 운운 하면서 어쩌구 저쩌구 하는데, 그 무슨 맹신이랍니까. 맑스가 아닌, 사회과학을 과학으로 정립한 막스 베버만 공부해도 그 과학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그렇게 함부로 내릴 수 없을텐데요? 더군다나 경제학 이전에 맑스주의가 나온 사회적 배경만 살펴봐도 선을 부정하느니, 현실에 대한 부정이니 라는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일리가 없죠. 마지막으로 개독 드립쳐볼까요? 사망자니 사고니 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인류 최대의 살인자는 예수 아닙니까? 아니 인류 최대의 살인자는 다윈이라는 기사까지도 본 듯 한데요? 나는 경제제도라던가 경제학의 역사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많지 않습니다. 위에 언급된 내용들을 어느정도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밖에 되지 않지요, 하지만 적어도 이거 하나만큼은 알고 있습니다. 단 하나의 간결한 주장도 아니고, 수많은 이론과 사상의 복합체인 경제체제라던가, 사회제도를 일러서, 싸잡아 "악이다" 라고 주장하는것이 얼마나 병신같은 일인지.... 이게 왜그리 병신같은 일인지는 점심시간 쯤에 나는 시간을 이용해서 따로 한번 트랙백 해보도록 하지요 ^^ 스플린터 블로그에서 댓글달때부터 알았지만 님 좀 짱인듯. 마르크스 원류로 돌아가면 (당시 시스템의) 부조리를 얘기하기는 해도 그런 유치뽕짝 음모론 수준까지는 안 가던데? 옛적에 마르크스 수업 들으면서 어지간히 코웃음 많이 쳤지만 너님이 몇줄로 ㅂㅅ만들만큼 개허접한 사상은 또 아니거든? 어디 반도국 운동권에서 현지화된 찌라시 보고와서 그러는건가? '좌파 이론'이라고 단일한 실체가 있는 것처럼 뭉뚱그리지 말고 Das Kapital 부터 시작하든지 해서 그쪽 동네 거두 누구가 어느 저작 어느 구절에서 이런 소리를 했는데 그게 어찌어찌 틀린거다 라고 논박을 하라고. 그리고 자기 논증에 대해 자신 있으면 학계에서 많이 보는 저널에다가도 보내고. 그건 또 못하지? 공산당 선언의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1) 장에서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다." "법률, 도덕, 종교, 그 밖의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부르주아적 편견에 지나지 않으며, 그 배후에는 부르주아적 이해관계가 가려져 있는 것이다." "이전의 모든 지배 계급들은 지배권을 장악한 뒤 사회 전체를 그들의 소득을 보장하는 조건들에 종속시킴으로써 이미 얻은 지위를 굳히고자 했다." 라고 하였고,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 장에서는 "그러나 자유니 교육이니 법이니 하는 당신들의 부르주아적 관념으로 부르주아적 소유를 폐지하는 데 대해 왈가왈부하려거든 더 이상 우리와 논쟁할 생각을 말라. 당신들의 사상 자체가 부르주아적 생산 관계, 부르주아적 소유 관계의 산물이니까." 라고 하여, 사상을 포함한 사회 전체적인 구조가 부르주아의 거대한 악의 또는 거대한 부조리의 산물이라고 전제한 뒤에 부르주아적 관념 - 즉 자본주의 사회의 관념 - 에 의한 반박은 의미가 없다고 반박을 봉쇄한 것이 맑스사상의 원전 공산당 선언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인장님은
'공산주의 = 맑스사상' 이라고 주장하시고 계신거군요. 유물론적 역사관이니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느니 하지만 사회제도 전체가 특정 계급의 이해관계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말은 현재 사회제도의 문제점을 특정 계급의 악의로 설명하려는 음모론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제도가 형성될 때 특정 계급의 이해관계가 반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며, 설령 완전히 특정 계급의 이해관계만 반영한다고 하더라도 그 제도를 선포할 때 공익을 위한다고 선언하기 마련입니다. 현대 민주주의제도의 기초 중 하나인 미국 독립선언서를 보아도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 독립선언서는 부르주아만 위하여 만들어진 것도 아니지만 실제로 부르주아만을 위하여 운영될 때 이 문구에 근거하여 현실의 제도를 고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비슷한 실례가 미국의 노예해방입니다. -_-/공산당 선언의 저자가 맑스이기 때문에 맑스사상은 곧 공산당선언에 나타난 사상, 공산주의입니다. 그럼 공산주의가 마르크시즘 아니면 뭔데? teferi//아나 이른바 맑시즘의 그런 편협한 면은 내부에서도 비판이 있어서
후대로 가면 저런 단순무식한 면이 많이 제거된다는 건 안배움? 그렇게 따지면 화학도 연금술에서 왔으니 비과학적이다란 주장이랑 뭐가 다름?? aaaa/후대로 가서도 이와 같은 관점은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좌파는 비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카테고리 글들 제목만 봐도 한숨나옴.
수업에 집중하고 질문도 하세요. 열심히 하셨다고 판단되면 교수한테 가서 따지세요. 등록금 토해내라고. 우리나라 3대 대학 조선, 중앙, 동아대학 경영학과이신듯. 몇명이 낚인겨. ㅡㅡ;; 아침부터 별....뭐든 어설프게 배우고나선 지가 뭐 대단한거라도 깨우친것처럼 잘난 척하고 마치자신만 아는것처럼 나대는 애들이 어느 학교든 한두명씩 이렇게 있다니깐..... 나이들고 좀 더 배우고나서 이글보면 얼마나 손발이 오그라들까....? 정신승리를 시전하는 분들이 보이는군요. 대표적으로 너. 인류의 경제구조는 음모에서 시작했군요. -..-;; 비공개 덧글입니다. 좌파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아니하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됩니다. =>인간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아니하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됩니다. Commented by Picketline at 2009/10/25 17:37 우리는 이런 논쟁(?)을 잘 활용하여 선전선동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이글루스에 당원들 많은거 공공연한 사실 아니었냐? 위에 선전선동하자는 새끼 포함해서 공인 찌질이 원래그런놈도 민노당원이고 노정태도 진보신당원이고 쟤들 엄밀히 말해서 알바야 알바 만약에 한나라당원이 여기서 블로그질하면서 노조 욕하고 그런다고 생각해봐라 당장 알바소리 나오지 ㅋㅋ 이러니 여기서 아무리 이지랄하면서 세상사람들이 다 자기편일거라고 떠들어도 현실은 좆 ㅋ 망 ㅋ 아니겠냐 다 그놈이 그놈이라 쪽수가 많아보이는것 뿐이니까 세상사람들이 다 자기네편일거라 자위하는건 오히려 한나라당.
이번에 재보선 3:2로 패했는데도 한다는 소리가.... 더 열심히 일하라는 채찍이라더군요. 풋 정신승리... ^_^v 4대강이나 세종시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요구한다는 생각은 안드나보더군요. Picketline님이 하신댓글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그걸 어떻게 알며 설령 진담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민노당, 진보신당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그건 어떻게 압니까? 추적해서 밝혀냈습니까? 그렇다면 증거를 보고 싶군요. 오히려 한나라당 응원하는 인간들치고 다들 어설픈 근거로 빙빙돌려서 말하는 궤변아니면 상대편 인신공격 수준에서만 머물뿐. 왜 자기네들이 옳은지에 대해서 제대로 증명하는 인간은 단 한명도 못봤습니다. http://gangerad.egloos.com/2463183
이게 농담으로 보이냐 ㅂㅅ아 ㅋㅋ 그리고 피켓라인 쟤 한총련 대의원 출신인거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 거짓말 같으면 직접 물어보든가 ㅋㅋ 공산주의가 맑스를 기반으로 했지만 맑스는 공산주의를 논한적이 없죠. 공산당선언에 담긴 사상이 공산주의라고 해도 그른 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인간들이 계속 현재의 마르크시즘은 안그래요~라고 실드치는데
그럼 한국에는 세계좌파중에서도 열등종자만이 수입됐나 보네요 ㅋㅋ 한국에 유난히 좌파중에서 극단적으로 찌질한면만 들어온거 맞는데요? 모르셨나? 좌파뿐 아니라 우파도 찌질합니다. 우리나라는. 괜히 '우리나라는 진정한 좌파도 진정한 우파도 없다'소리가 나오는게 아닙니다만. 만선이요^^ 아....암담하네요.
중간쯤 읽다가 말았습니다. <태백산맥>이라고 있어요. 그걸 읽고 나서도 "음모론"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태백산맥>이라고 들어는 봤죠? 제발 책 좀 읽고 글 좀 쓰세요.... 머리 속에 생각 다 끄집어내서 마구 갈긴다고 죄다 글은 아니지 않습니까. 대체 돈이 얼마나 많아야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뭐야 이 찌질이는 ㅎㅎ
태백산맥이라고 있습니다~ ㅋㅋㅋ 좌파 얼치기들 중에는 태백산맥 한권보고 한국 근현대사 마스터한듯이 자랑하고 다니는 놈들이 있다더니 정말이구나 ㅋㅋㅋ 아 졸라 웃기네 <태백산맥>이라고 있어요~ 들어는 봤어요? ㅋㅋ 제가 어제 바빠서 갑자기 닫느라 정리를 제대로 못하고 닫았나 보네요.
그 한권의 책만 읽어도 대략은 파악이 될 거란 말입니다. 민중이 뭔지, 부르주아가 뭔지. 부르주아라는 것들이 정말 지들이 잘나서 태어나면서부터 자동으로 가질 거 가지고 떵떵거리고 난 건지. 읽어나 보고, 좌파니 얼치기니 떠들지요, 로긴도 안 하고 뒤에 숨어서 재잘거리는 11아. 님아 궁금한게 하나 있음. 경영학과라고 했는데 교수님에게 이글이 들키면 어떻게 될 것 같음? 요즘엔 이런 안기부 홍보물같은글도 이오공감에올라오는군요..
이거뭐 지금이 2000년대인지 쌍팔년대인지.... 하기사 정치인이라는놈들이 http://media.daum.net/politics/assembly/view.html?cateid=1018&newsid=20091023023311241&p=hankooki 요딴소리나하는 세상인데..뭔소린들안나오겠어..; 지금은 쌍팔년도에 맑스레닌주의를 학습한 386이 기성세대로 진입하였으니까요. 확실한건 좌우로 나누는 사람들이 병신 성지 순례 와봅니다. 아래는 좀 긴 사족.. -------------- 수꼴보수 정치경제이론이라 함은 일반적으로 맑스의 이론에 반대하고 노동과 노동자를 무시하고 천민자본주의에 열광하며 기성 체제에 기생하는 것 등을 포괄하고 있는 이론을 말합니다. 수꼴보수와 좌파이론이 동등한 가치가 있고 동등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으며, 좌우의 날개로 비유하며 한쪽이 없어져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수꼴보수 정치경제이론은 결코 좌파의 이론과 동등한 가치를 가지지 않습니다. 수꼴보수이론을 지지하는 것은 곧 그가 속해있는 공동체에 대한 죄이며 전 인류에 대한 죄이기도 합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바로 수꼴보수이론은 과학적 사고방식에 근거하지 않고 색깔론과 권위주의에 근거하였기 때문입니다. 색깔론의 정의를 내가 가진 백과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색깔론(Red Complex)이란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사건의 원인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할 때, 배후에 거대한 친북 좌빨조직이나 비밀스런 단체가 있다고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이 색깔론의 정의는 바로 수꼴보수이론의 전개방식과 정확히 들어맞습니다. 지만원의 문근영 빨갱이 사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문근영이 기부를 한 이유를 배후의 거대한 빨치산 선전 목적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지 씨는 지난해 11월 문근영 외할아버지의 빨치산 전력을 문제삼는 글을 홈페이지에 올렸고, 이에 대해 SBS가 색깔론이라고 보도하자 왜곡 보도라며 소송을 냈습니다. 그래서 서울남부지방법원은 당연히 원고 패소 판결을 냈습니다. 수꼴보수이론은 현실의 부조리를 색깔론 으로 설명합니다. 빈부격차가 발생하는 원인은 서민 계급의 게으름 때문이다. 자본가가 노동자보다 더 잘사는 이유는 노동자보다 자본가가 우월하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이 발생하는 이유는 산업상비군을 만들어 노동자를 더 잘 대우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완벽하게 현 체제가 유지되는 원인은 현 체제를 유지하는 요소 - 정부, 제도, 문화, 철학, 각종 사회이론 등 -가 서민 계급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고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분배보다는 성장으로 현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수꼴보수이론의 주된 내용입니다. 즉 현재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은 전부 빨갱이들의 책임이고, 현 사회가 유지되고 있는 이유도 빨갱이 퇴치를 위한 거대한 색깔론 운동의 일환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수꼴보수는 권위적입니다. 이는 이론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현실을 관찰하여 이론을 검증하는 과학적 사고방식과 대비되는 것으로, 권위있는 누군가가 한 말을 그대로 믿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박정희입니다. 박정희의 선견지명이 현실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지에 대한 비판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는 수꼴보수는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비판적인 자세를 가진다면 예의 색깔론이 힘을 발휘합니다. 즉 박정희 친일에 대한 비판은 빨갱이들의 적화통일 야욕을 숨기려는 빨갱이들의 모함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수꼴보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아니하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됩니다. 즉 현재의 문제점만 보고, 그 문제점이 빨갱이 때문이라는 결론을 미리 내려놓은 뒤에 그 결론을 잘 설명하는 것 같은 이론을 취사선택합니다. 그리고 자본가의 입맛에 맞는 이론이 선택되면 그 이론은 현실의 관찰로 검증하지 않고 무조건 참으로 믿고 권위를 부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꼴보수는 제국주의에 의한 1,2차 세계 대전과 그 사이의 경제 대공황, 수정 자본주의 이론, 이승만 집권, 박정희 집권, 전두환 집권, 외환위기,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사태, 자본주의사회에서 한결같이 일어나는 자본 독점과 정경유착, 극심한 빈부격차는 무시하거나 도마뱀꼬리를 짜릅니다. 즉 진정한 수꼴보수주의자가 아닌 사람이 집권해서 비극이 일어났고, 수꼴보수주의에는 잘못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의 색깔론을 설파합니다. 즉 빨갱이가 자본주의를 폄하하기 위해 침소봉대한다거나, 박정희와 전두환에 반대한 수꼴보수주의자가 있었음에도 빨갱이의 방행공작으로 밝혀지지 않았다거나 등등. 이론은 옳은데 현실에 맞지 않는다거나,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아야 한다거나 하는 식의 말은 수꼴보수이론에 결코 맞지 않는 것입니다. 수꼴보수 이론은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것입니다. 색깔론에 휩싸여 비판적 검토를 할 수 없는 이론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론이 틀려서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이고, 국가는 좌우 스펙트럼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틀린 이론을 퇴출시키고 올바른 이론이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딱 적절한 비유에 감탄했습니다...^^;; 왕창 짦은 공산당 선언 읽고 다 읽은척 하지 마시고 가서 자본론을 읽고 오세요 읽을 수 있으면 말이지만요 자본론을 읽었다면 그에 근거하여 이 글을 반박해 보시지요? 진짜 개소리 하네. 맑스이론하의 혁명에서 수천만명 죽어서 좌파경제가 나쁜거면. 우파적 제국주의 식민지화와 식민지전쟁인 1차대전때 죽은거랑, 극우파시즘으로 시작된 2차대전, 에스파냐 내전, 베트남전쟁은 어쩔겨?
대한제국을 식민지화 시킨것도 극우 일본제국인데. 맑스주의국가간에도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이 중월전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제국주의가 전쟁을 일으킨다는 분석은 옳지 않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박이다. 학문다양성 따위는 기각한 보수가 보수일 수 있는건가요 ㅋㅋㅋ 늦게나마 성지순례 와봅니다. 적당하게 반박할 수 있는 글에만 리리플을 다는 teferi님의 센스에는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만... 몇 가지 명언들을 모아두는 것으로 순례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좌파이론을 지지하는 것은 곧 그가 속해있는 공동체에 대한 죄이며 전 인류에 대한 죄이기도 합니다." "후대로 가서도 이와 같은 관점은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좌파는 비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맑스주의국가간에도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이 중월전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제국주의가 전쟁을 일으킨다는 분석은 옳지 않습니다." 글을 쓰는 것은 좋지만 거기서 툭하니 이런 결론을 도출해내시는 teferi님의 논리구조는 수십가지 논리를 생략하셨기에 사람들은 teferi님이 "나는 옳고 너는 틀린거다."라고 발언하는 거라고 생각하죠. 다음부터는 좀 더 제대로 된 글을 보기를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시대 지식인들의 좌우명인 "앵-똘레랑스를 제외한 모든 것에 대한 똘레랑스"를 가슴 깊이 새기시길 바랍니다. 똘레랑스야말로 엉터리 논리입니다. 똘레랑스는 진화론과 창조과학, 의학과 한의학, 주류경제학과 맑스경제학에 동등한 가치를 부여합니다. 뭐든 xx는 yy와 다르다! 하지만 xx는 yy를 인정한다! 라고 하면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엉터리인지를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올바른 이론은 오직 하나로 수렴합니다. 진화론과 창조과학은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자같은 씨발새끼 후장에 좇박힌 씹창 후로게이새끼 ㅗㅗㅗㅗ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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